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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씀 Apr 06. 2018

감정의 편식

찰과상, 근육통 그리고 성장통의 사이.

글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일 같이 글을 한 편씩 쓰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어렸을 적부터 소설과 시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취미로 글을 써왔고,

마음이 어지러우면

무작정 펜을 집어 들어

아무 글이나 써야만 직성이 풀렸다.

정신없이 써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이,

글의 구조에 맞춰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 글의 힘에 놀라고는 했다.


십 대의 절반을 유학으로 보내면서

서양식 교육을 통해

가장 기초적인 문법부터

Introduction과 Body, 그리고
Conclusion의 구조안에

자신의 주장을 가장 심플하고

효과적으로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글을 쓰는 것을 지독하게 훈련 받았었으며,
자신의 의견을 타당하고 조리 있게

글로 담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글의 목적과 내용을 받아들이는 독자에 맞춰
가장 영향력 있고 소화하기 쉽도록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또한 배웠다.
창작에 있어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다다랐을 때,
필요에 의해 글을 쓰는 경우,

배웠던 레시피를 따라서

기계처럼 써낼 수는 있으나

순수 창작물은 단순한 조리법을 따르는

그것들과는 매우 상이하다는 점이다.


매일 같이 무작위로

단어 하나를 던져주는 어플이 있다.
그 단어를 기점으로

현재 날아드는 생각들을 조합해서
글을 쓰는 것이 내겐 일반적인데,
정말로 기분이 좋을 때는 긍정적이고

예쁜 글 한편이 나오지만,
반대로 심기가 불편할 때는

아무리 밝게 쓰려고 해도
지극히 어둡고 칙칙한 글이 나오게 된다.
우울증을 앓는 화가의 그림들이 대부분 강렬하고 어두운 색깔들로 칠해지듯이,
창작이라는 것은 창작자의 감정상태에 따라서
그 색깔이나 선율, 문장들이

그대로 반영되게 된다는 것이고,
창작물이 결코 그 울타리 밖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창작자가 거짓으로

창작물을 토해내지만 않는다면.


이는 어쩌면 매우 다행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글들이,
창작의 제 목적을 상실한 채

거짓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독자에게 달달하고 읽기 좋은 글들만이

범람하게 된다면,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 인간의 감정에 있어서
일종의 영양실조를 겪게 될지도 모르겠다.
미디어와 SNS에서 유행하는,
현대사회에 지친 사회인들을 위로한답시고
짤막한 미사여구들을 짜깁기 하여 만들어낸
수많은 시집들이나 수필들처럼.
우리는 우리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인간의 다섯 가지 감정들 사이에
무수히 다양한 감정들이 스펙트럼으로 존재하듯이,
지금의 내 어두움을 밝음으로 채우기 위해,
마치 밝고 강함이 어떠한 부정적인 것에 맞서 싸워
'일어난 상태'라고 강요하는 사회의 요구에
반드시 부응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때로는 외롭고, 힘들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말하는 '넘어져있는 상태'가,
실은 오히려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달리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지금 현재 우리가 아픈 것이,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 생긴 찰과상이 아니라,
열심히 달림으로 인해 오는 내면의 근육통일 수도,

혹은 더욱 크게 자라나기 위한

성장통 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신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이유로,
지금의 내 고난과 역경조차 더 나음을 위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는 지독히도 멍청하고

낙천적인 나지만,
밝음과 설렘과 달달함을 사랑하는 나지만,
어두운 감정 역시 끌어안고 돌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감정을 편식하다가는,

그 내면의 어두움이 언제 곪아서
깊은 병으로 돌아와

우리 자신을 덮칠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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