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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씀 Apr 07. 2018

교육의 계급, 방식, 그리고 방향성.

아이들의 창의력을 억압하는 어른들의 부자 되기 공식

나는 TV를 즐겨보지 않는다.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며 인생의 오락과 안식처를 찾는 사람들을 까내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소파에 앉아 남들의 인생을

입 벌리며 보고 있기에는

집중력이 너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인생 앞가림하기도 바빠

아둥바둥 대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SNS에 올라오는 영상들을

입 벌리고 보고 있는 나를 보며

끊임없는 자기반성이란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곤 한다.

 

여느 때처럼 입을 벌리며

오른쪽 엄지를 바쁘게 움직이던 중,

흥미로운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았다.

청각과 언어 장애를 가진 부모를 둔

이 집 안의 아들은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도 풀기 힘들어하는 수학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고, 과학 논문들을 즐겨 읽으며,

악보를 쥐어주면 금세 연주를 할 줄 알고,

여러 가지 언어를 너무도 쉽게 흡수하는 데다가,

그림도 정말 수준급으로 그려내더란 것이다.

두 가지 장애를 양 부모가 가지고 있고,

부모들의 어렸을 적 학업이

그리 뛰어나지도 않았으며

지극히 평범한 지능을 가진 두 남녀 사이에서

이런 괄목할만한 영재가 나왔다.

부모들의 지능적 유전자가 뛰어났던 것일까?

그들이 갖은 불편함 때문에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했던 것뿐일까? 아니면 그들의 조상 중에 내려오던

천재적인 유전자가 마침내

아이에게 전해진 것 일까?

어쩌면 지극히 낮은 확률로

돌연변이가 나온 것 일지도.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가 아이를

다방면으로 검사했고, 결과는 꽤나 흥미로웠다.

부모가 모두 청각과 언어 장애가 있어서,

자식에게 어렸을 적부터 안 된다고 하거나

잘 못 됐다, 혹은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가 무엇을 하든,

잘 못된 길을 걷지 않는 이상

모든 것을 미소로 응원해주었다.

부모의 교육적 억압이 조금도 없었기에,

아이의 뇌는 그 어떤 장애물과도 맞닥뜨리지 않고 끊임없이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인간의 뇌가 가장 많이 발달하고

성격과 인성 등이 정해지는 유년기에,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이

다른 자식들에게 뒤쳐지거나

무시받지 않게 하기 위해 조기 교육을 시킨다.

다섯 살짜리가 학원을 다니는 세상이고,

태교로 영어 사전을 배에다 대고 읽혀주는 것이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방식이다.


전 세계의 모든 교육 시스템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과목들의 계급화가 존재한 다는 점이다.

수학, 과학, 언어가 항상 최고 계급에 속하고

인문학 관련 과목들이 그 다음으로 있으며,

모든 교육 시스템의 바닥에는 예체능이 놓여있다.

심지어 예체능 안에서도 계급이 나뉘어져 있다.

음악과 미술은 예술 안에서도

춤이나 연극에 비해 조금 더 취급을 받는다.

학교에서 연극 수업이나 무용 수업이

수학이나 과학만큼 학교에서

매일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오히려 한국 학생들은 고3이 되면

예체능 수업을 커리큘럼에서 빼버리지 않는가?

현재 교육 시스템은 이렇게 지독히도

일 편향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왜 이런 것일까?


역사적으로 공교육의 역사는

19세기부터 시작이 된다.

산업화가 전 세계적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교육은 일에 가장 필요한 과목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에 만들어진 교육 시스템이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으면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취미로만 해라. 너 그거 해서 돈 못 번다"

"음악 하지 마라 넌 뮤지션이 될 수 없어"

"그림 그려서 뭐해먹고 살래 도대체"


이제 세상은 몇 백년 전 보다

훨씬 먹고살만한 세상이 왔고,

산업화가 꽃을 피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다.

예술에도 다양한 직업들이 그에 맞춰 파생되었고, 어느 분야에 실력이 있으면

어느 대기업 부장들 보다도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왔다.

다양한 게임 콘텐츠로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연봉을 한 달 안에 벌어들이고 있다.

빵 한 조각에 범죄를 고민하는 시기가 지났고,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전 세계의 교육 시스템은,

'대학 입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교육 시스템이

수많은 창의적이고 타고난 천재들을,

그들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학교에서 잘 했던 것들은

선생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억압만을 받아 왔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롭게 창조될 수 있는 분야의 창의적 인재들을

대학입시와 취업만을 위해

극히 한정된 분야의 교육에

그들을 강제로 줄 세우고 있다.

바다에서 빠르고 멋지게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들의 아가미를 강제로 제거하고

육지에서 사자와 코뿔소들과 함께

달려보라는 식이다.

은행원 돼서 돈 벌고 결혼 잘 해야지.

대기업 가서 폼나게 살아야지.

여러 삶의 다양한 모습들 중

극히 한정되어 있는 부분만이 성공이고

유일하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있다.

인구의 도대체 몇 퍼센트가

검사, 의사, 대기업 임원들이란 말인가?

그 극소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퍼뜨린 말이라면 이해가 가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극소수에 포함되지 않은

절대적 대다수 사람들이다.

사회적인 성공과 행복을 누리는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는

행복할 수 없다는 식으로

세상을 그려내고 있는 어른들의 패배의식.

난 그들의 패배의식에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잘못된 패배의식이,

끝없는 가능성을 갖은

자라나는 재능의 새싹들을

짓밟으려 한다는 것에,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난다.

그들이 스스로 그린 꿈에 다다르지 못했고,

스스로가 만든 치욕과 피해의식의

철장 안에 갇혀서 갖게 된 분노를

왜 죄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인가?

왜 그들 스스로가 만든 독극물을

그들의 선에서 끝내려 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보내며

아이들의 꿈과 가능성을 깎아내리고

그들과 같은 모습의

패배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어째서 세상은 너희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너희가 적대시 여겨야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혹독한 정글이라고만 가르치는걸까.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더 이상 대학교 졸업장을 가졌다고

취업이 되지 않는다.

유네스코는 30년 이내에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들의 수가,

인류가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교육과정을 이수한 모든 사람들의 수를

넘어서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리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시절에는

대학교 졸업장이 있으면 어디든 취직이 됐다.

이제는 학사는 커녕 석사로도 부족하고,

애매하니 박사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내가 실제로 주변에서 보고, 듣고, 겪고 있는

현실이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교육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빠르게 지식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전 세계적으로 IT산업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실리콘 밸리에서 살고 있다.

모래를 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연금술과 기회의 땅.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유튜브 등

전 세계를 휘어잡고 있는 기술 거인들의 탄생지.

경영학도인 나는 이 곳에서

내 또래인 20대 30대 중

소위 성공했다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봤다.

엔지니어로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경영학도인 내 얼굴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경영학? 필요 없어요.

그딴 걸 도대체 어따 써먹어요?"

나는 전혀 그 사람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에서 현실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엔지니어들의 세상에서

경영학이란 뛰어난 극소수들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도 않고

자신들의 위에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며

자기가 만든 제품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기보다 더 받아가는 배 아픈 존재들이거나,

얕은 지식으로 세상에 나와서

취업도 못한 채 벌벌 거리고 있는

한심한 존재라고 생각할 테니.

이러한 현상은 직업 관련 일들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만난 몇몇 공대생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공대 프라이드'로 인문계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것을 굉장히 빈번히 봐왔다.

한 여학생이 내게 울며 하소연했다.

"도대체 자기들은 얼마나 잘 나서

누군가가 꿈을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을 무시하는지 모르겠다"라며.

난 안타깝단 생각이 들었다.

울고 있는 학생이 아닌, 이 학생을 울린 학생들이.

수백 년 전에 산업화에만 초점을 맞춘

이 낡은 교육 시스템이,

어린 학생들에게 맞지 않는 가운을 입히고

그들의 시야를 좁히다 못해,

멀게 하고 있다는 점이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기술의 땅에서,

내 주변 지인들 중에는 영문학 전공자들이

애플에서 일을 하고 있고,

미술 전공자들이 구글에서 일하고 있으며,

생물학 전공자들이 반도체 제조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무엇을 배웠느냐도 중요하지만,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잘 적용하고

급변하는 상황에 맞춰 창의적으로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교육의 위대한 점은,

교육이 아이들의 형체가 없는 꿈들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먼 미래로 데려다줄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5년 후의 신기술이나,

다음 주의 주식 시장,

당장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게 될지도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삶에서,

교육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는

꽤나 정교한 포탈과도 같다.


Intelligence는 더 이상 얼마나 공장에서,

은행에서 일을 잘 할 수 있는가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Education은 더 이상

산업화의 프레임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

교육 시스템은 이제,

인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들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른들의 패배의식으로 만들어낸

'실패'로부터 그들을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무겁게 짓누르는 갑옷을 입히기보다는,

아이들이 바다, 육지, 하늘 등의

다양한 공간에서

자신들에게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껏 누빌 수 있도록

그 길을 찾고,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온전히 다 보기도 전에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결코 그들의 미래를 책임져 줄 수 없다.

우리의 임무는 그들이

우리가 보고 겪은 과거와 현재에

맞춰 살아가도록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그들만의 새로운 미래에 맞춰

그들이 잘 대응할 수 있도록

세상을 열어주고

눈과 귀를 열어 경험하고 체험하고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터득하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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