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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씀 Mar 22. 2020

누군가는 화염병을, 누군가는 촛불을 든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마치 둑이 무너져내려 쏟아져 나온 거센 물살이

온 마을을 휩쓸고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이 동네의 둑은 종종

이렇게 자주 무너지고는 하는데,

희한하게도 금이 갔던 위치가

매번 천차만별 다르지만,

물은 언제나 그랬듯

같은 방향, 같은 방식으로 쏟아져 나왔다.


물살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때쯤이면,

둑의 어느 부분이 취약해서 무너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수리공사를 하고,

어떠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이후에 같은 참사가 벌어지지 않을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디로 피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둑에 구멍을 낸 죄인들 뿐만 아니라,

저 둑을 맨 처음 허술하게 지었던 건축가와

저 둑을 평소에 관리하던 청소부와

처음 물살을 보고 소리를 질러

알리지 못했던 목격자를

모두 교수형에 처할지,

아니면 화형에 처할지 결정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바탕 정의로운 심판이 집행되고,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모든 것이 물에 잠긴다.


아까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동안

죄인들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지기는커녕,

가만히 서서 둑이 어쩌니 하며 떠들던 놈들도

화가 나서 모두 불 질러 버렸는데,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침을 뱉고 돌을 던지지 않은 놈들도

사실 어쩌면, 둑에 구멍을 내는데

동참한 공범일 수도 있지 않은가?

괜히 찔리니까 돌을 던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들 역시 함께 처단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차피 영원히 잠겨있을 것만 같은 이 마을은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테니까 말이다.


-


하루 종일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하루였다.

분노보다는 피해자들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고,

충격과 함께 원인을 알 수 없는

망연자실함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충격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동안,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모두가 겪고 있는 이 분노와

기존 시스템에 대한 변화를 위해

불이 활활 타고 있는 화염병을 들었고,

또 누군가는 조용하지만 밝게 빛나는 촛불을 들었다.


감히 그 고통을 헤아릴 수 없는

피해자들에 대한 걱정 어린 마음과

그 고통을 선사했던 악마같은 이들에 대한

분노는 모두 같았으리라.


그렇게 모두가 신음하는 동안,

예상치 못했던 관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자신과 같이 활활 타고있는

화염병을 들고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모든 이들을 죄인들과 함께 불 지르려 하는

몇몇 사람들의 광기어린 모습을.


그들은 화염병을 들고 있던 나의 어깨를 토닥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멸시하며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현재 하나의 커다랗고 뜨거운

이 분노의 물살 속에서,

정말로 자신만의 불을 들고 서있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화염병을 들었겠지만,

그중에는 분명 아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촛불을 들고 싶었으나,

모두가 화염병을 드니

함께 화염병을 들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촛불도 들고 싶지 않았으나,

화염병을 드는 것이 멋져 보여

나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화염병을 들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화염병을 들지, 촛불을 들지

고민하기도 전에, 화염병을 들지 않으면

저들과 함께 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휩싸여, 화염병을 들었을 것이다.


문득, 지금 밝게 타오르고 있는

이 거대한 불빛이

오롯이 아픈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들고있던 화염병을 조용히 내리고

촛불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커다란 불길이 제대로 쓰이지 않으면,

되려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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