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속씀 Feb 19. 2020

졸업식이 취소된 모든 대학생들에게.

졸업식이 없었으니, 우리는 평생 학생으로 남을 것이다.

취익-


회사 버스 문이 열렸고,

나는 노곤한 몸을 이끌며 이내 발을 내디뎠다.

3주간의 신입 사원 연수가 드디어 끝이 났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느 초등학교에 걸린

'졸업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 오늘 내 졸업식이었지 참.

2011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했던 나의 대학 생활도,

2020년 오늘, 축하한다는 학교 메일과 함께

막을 내렸다.

태평양을 넘나들며 학교를 옮기고,

하고 싶은 것만 쫓으며 살다 보니

어느새 대학생 신분을 햇수로

9년간 유지해버리고 말았다.

(소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그로 인해 꽤나 기대했던 해외 연수가 취소되었고,

학교 졸업식 역시 취소되었다.


사실 학교 졸업식을 그다지 고대하지는 않았다.

단지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하고,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한동안 보지 못했던 내가 사랑하는 후배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며 술 한잔 기울이고 싶었을 뿐.

그러나 고작 메일 한통으로

나의 졸업 여부가 공식화되었다고 하니,

실감이 나지는 않는 게 사실이다.

어제는 학생이었고,

오늘은 갑자기 학생이 아니라고?



나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좋았다.

어차피 인생은 죽을 때까지 배움의 연속이지만,

사회에서 특별히 규정하는 '배우는 사람',

즉, '학생(學生)'이라는 신분은,

나에게 무모한 도전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일종의 보호막과도 같은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다.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언제나

'배움'이고, '성장'이었다.


연수원에서 작은 회의실에 둘러앉아,

같은 직군 멘토님들과의 멘토링 시간을 가졌다.

신입 기획자들의 질문, 고민을 묻고

멘토님께서 답변을 해주시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멘토님께 일종의 정체,

혹은 status quo에 관한 고민을 나누었다.

대학생 때는 끊임없이

내 주변에 널려있는 문제들을 탐색하고,

어떻게 하면 그 문제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나만의 해결책을 담은 결과물들을

부족하게나마 뽑아내었는데,

더 이상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가 되었으니,

학생 때의 아무것도 모를 때 나오는 열정과

얕더라도 넓게 바라보는 시야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 문득 두려워졌다.


물론, 지난 3개월 간 나는

학생 때와는 전혀 다른 성장 곡선을 경험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입사하자마자 다음 배포의 메인을 맡게 되었다.

신입사원에게 맡긴 간단한 과제라고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부족한 만큼 밤을 새웠다.

연수를 떠나고 개발이 완료되기

직전까지의 몇 개월 간, 정말 정신없이 살았다.

마치 집을 짓는 동시에 건축학 서적을 뒤지며

시멘트 섞는 법을 배우는 사람 같았다.


내가 지은 집이

제대로 지어졌는지에 대한 확신은 아직도 없지만,

리더님은 회식 때 내게 웃으시며

작은 귀띔을 해주셨다.

나와 함께 협업했던 개발자 분들이

최근에 회의 도중,

내가 신입사원인 줄 몰랐다고 말씀하셨다고.

신입사원이 아닌 척을 하느라 고생했는데,

조금은 먹혀들어 간 듯하다.


배워도 배워도 아직 배울게 너무 많다.

그래서 사실 즐겁다.

가만히 있어도 뭔가를 계속해서 배우게 되니까.

그도 그럴 것이, 백지일 때는 무엇이 묻든 간에,

백지인 상태보다는 나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로 인해 또 다른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지금은 배울 것이 많다고는 하지만,

가만히 배우기만 하는 것에 익숙해질까 봐.

배우고 있는 것 외에

다른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것에 게을러질까 봐.

우리는 끊임없이 탐구하고, 배워야 한다.


오늘, 사랑하는 모교에서는

문자 메시지와 메일 한 통을 통해

내가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고 세상에 공표했다.

누가. 내가?

뭐래. 난 아직 졸업식도 안 치뤘는데.


2020년,

졸업식이 취소된 모든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다.

졸업식이 취소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비록 모교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이

인생에 남지 않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분명 졸업식을 치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아직 학생이다.

아니, 죽을 때까지

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평생 학생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빼애애액)


당신이 어느 곳에 있든,

앞으로 시간이 들어 육체가 나이가 들더라도,

학생의 본분을 잊지 말자.

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언제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반짝해지자.


사회가 규정한 나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도전과 실패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자.


우리가 보기에 무엇이 잘못되었고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마주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반문하고,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꿔보자.


설령 바꾸지 못하더라도

씩씩대며 돌아서고, 마냥 철없이 분노하자.


우리는 아직 모두,

그리고 앞으로도 쭈욱.

학생으로 남을 테니까 말이다.




당신들의 취소된 졸업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고생 많았다.

앞으로도 더 고생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2020년을 위한 뒤늦은 2019 회고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