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을 지키던 여러 종류의 사랑 중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안타깝게도 그건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한때 나에겐 가족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랑은 아주 단순한 계기로 시작되었는데, 그 사실은 가끔 나를 슬프게 했다.
나를 낳고 기른 나의 부모. 나와 살을 부비며 성장한 나의 형제자매. 늘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혈육들. 내 나이만큼 나를 긴 시간 사랑해준 이들보다도 그를 사랑했다.
사랑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사랑의 질량과 부피, 지속 가능한 시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가 한 건 하나의 연애인데 왜 우리의 사랑은 달랐을까.
내가 아직 그를 덜 좋아했을 시절, 그는 나에게 섣불리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의 말이 조금은 의심스럽고 조금은 부담스러우면서도 나는 쉽게 가슴이 뛰었다.
사랑을 묻는 나에게 그는 너무 간단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 마음을 꺼내어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네가 내 머릿속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나는 그 말들이 하나같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먼저 잔다는 인사를 남기고도 오래 잠들지 못한 채 “사랑해”의 여흥을 홀로 감당했다.
그 사람은 이후로도 많은 밤, 대답을 듣지 않고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것이 간지러워서 침대 위에 흩뜨려놓은 내 몸이 배배 꼬여대기도 했다.
어쩌다 다툼이 생겨도 늘 내가 이기게 되었다. 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툼이 어렵지 않다. 쌓여가는 부재중 전화 개수를 확인하며 동시에 사랑을 확인하기도 했다.
못 이기는 척 그의 사과를 받아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혹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는 이전보다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간단하게 말하곤 했다.
어느 순간 내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버렸을 때. 더는 내 마음을 말하지 않고 견디기 어려웠던 순간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다시 내 귀를 통해 들려왔을 때.
나는 내 사랑이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지점부터였을까. 한계를 모르고 뻗어나가는 내 마음과는 달리 네 마음이 정체되다가 서서히 기울어가기 시작한 게.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낄텐데.
사랑한다는 말은 내 안의 사랑을 자꾸만 증폭시켰다. 그 말이 일상처럼 배어들게 되었을 때도 새삼스럽게 설렜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던, 아니 그런 줄 알았던 우리의 사랑도 점차 무뎌져갔다.
유일한 것은 없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끓었다가 식어갔다. 또는 상대방이 식어가는 과정을 아프게 지켜봐야 했다.
이별이 코앞으로 다가왔던 날.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 사람들에게도 사랑이, 이별이 있었을텐데.
어쩌면 저들은 저렇게 태연하고도 단단하게 일상을 지내는 것일까. 평화로운 얼굴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무뎌진 쪽일까, 무뎌짐을 지켜봐야 했던 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