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일본 도쿄에서 살던 시절, 어학공부 방법중 하나인 일본 드라마 보기에 열심이었다. 완벽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일본 드라마 특유의 정서가 낯설게 느껴지기는 했다. 주제의 다양성이나 과감하고 컬트적인 요소들도 눈에 띄었다. 세월이 지나 우리 드라마에서도 좀 더 다각적인 소재 접근의 시도들을 볼 수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우리의 드라마들은 대중성을 감안한 전형적인 틀이 존재하는 것 같다. 어쩌면 국민성에 기인하는 부분도 없지 않은 듯 하다.대중적인 흥행이 곧 수익이라는 관점에서는 말할 나위 없거니와, 옆사람도 보고 뒷사람도 즐겨보는 드라마를 나도 보는 군중심리 안에서 이내 안정감을 찾게 되는 사람들의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한국드라마가 매운 맛, 짠맛, 단맛을 표현한다면일본드라마는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도무지 애매모호한 밍밍한 맛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얼 전달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무심코 넘어간적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변한건지, 다시 보게 된 일본 드라마에는
여백의 미가 보였다.
시청자가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곧 '여백'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해석하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생길 수 있지만, 작품이 뿌리를 두고 있는 큰 중심이나 주제에는 대부분 접근할 수 있다.
극의 배경과 연기, 대사를 통해 매운맛이면 매운맛이다, 짠맛이면 짠맛이다를 일일이 떠먹여주는 직접적인 접근이 아니라 ‘그 맛’의 근처까지만 보는 이를 데려가 주는 전개방식인 것 같다. 그러면서 좀 더 깊게 관여하게끔 하는 매력도 있다.
메세지나 감상을 단순하게 전달받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예전에는 심심하다고만 여겨졌던 일본 드라마들이 이제야흥미로워졌다. 비교적 최근 개봉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를 보고 난 후의 소감도 비슷했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묵직하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한국 작품이지만 일본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김희애 주연의 '윤희에게'또한 아직은 낯설게 여겨지는 동성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자극적인 한방이 있는 작품은 보고 나서 돌아서면 몇마디 후기로 끝나지만, 진한 여운이 남는 작품은 계속 생각하게 되고 기억에 더 잘 남는다.
일본 드라마와 영화 '심야식당'은 작품의 제목만 들어봤지에피소드들을 제대로 본 건 최근이었다. 역시나 일본드라마 특유의 정취가 묻어난다.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문을 여는 도쿄 뒷골목의 작은 식당. 단일 메뉴이지만 주인장이 만들 수 있는 음식이라면 다른 메뉴도 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 시간, 심야식당을 찾는 단골들은 주인장과 다른 손님들에게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그들은 이 곳에서 때로는 고백처럼 , 때로는 독백처럼 말한다.
가끔은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때보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거리가 있는 사람에게 더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때가 있다. 어떤 이해관계도 혈연도 얽히지 않은, 관계없는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는 건, 그저 내 얘기를 들어주면 족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솔루션이 없는 고민들, 시간이 필요하거나 마음의 변화가 필요한 문제들도 세상에 많으니까 말이다. 가끔은 뜻밖의 조언으로 솔루션을 발견할 수도 있는 터. 그러고 보면, 때론 인간관계라는게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다.
심야식당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요리를 준비하는 주인장과손님과의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가 있듯이, 마음껏 위로를 받을 때에도 적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일본 유학시절 많이 들었던 말 중 일본인들은 타인을 대하는 겉마음(たてまえ)와 속마음(ほんね)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그들은 그게 당연한 거라고 대놓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의 세계에서는 겉과 속이 같기란 힘든 일이다. 심야식당에 찾는 단골들은 주인장이 내어주는 따뜻한 밥 한끼를 먹으며 속마음을 이야기 한다. 그렇게 훌훌털어버릴 수 있는 장소, 내 이야기를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든든한 내편'과도 같은 존재만큼 큰 위로가 또 있을까? 이런 위로의 힘이 흥행의 비결 아닐까?
정혜신 작가는 저서 '당신이 옳다'에서 충조평판 날리지 말고 공감하라고 했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고 그저 공감만 하라는 것이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당신이 옳다' (정혜신 저)중
*사진 출처 : 영화 ‘심야식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