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나의 끝사랑
유년시절부터 노래를 잘 부르기 보다는 잘 듣기를 좋아했다. 생애 최초로 좋아했던 가수는 초등 저학년 무렵 인기스타였던 전영록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대중가요 시장이 배출한 걸출한 인기가수들을 퍽이나 사모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엔 유일한 오락거리가 텔레비전이었고, 그 중 빠져들만한 콘텐츠가 가요 프로그램, 인기가수들의 노래와 춤 뿐이었던 것 같다. 여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등학교 때 한창 노래방이 유행할 때는 방과 후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그룹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 조하문의 '이밤을 다시한번',그룹 솔리드의 '이밤의 끝을 잡고' 등 가요를 부르며 학업 스트레스를 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땐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이 노래방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부르던 게 백미중의 백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노래를 벗삼아 성장기를 보내고, 처음으로 집을 떠나 호주 어학연수를 갔을 때 노래는 내 마음 속 보석상자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낮선 땅에서 외로움을 달래던 플레이리스트에는 그룹 토이(TOY)나 윤종신, GOD의 명곡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글을 쓸 때도 노래는 자연스럽게 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쑥쓰럽지만 그동안 썼던 노래에 얽힌나의 에세이들을 모아봤다.
나의 안식처가 된 노래 (feat. 거짓말같은 시간/TO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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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퍼스(Perth)의 7월은 습하고 스산한 바람이 불던 겨울이었다. 저녁 여섯 시가 넘으면 인적이 드문 거리 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단층의 집집마다 노랗고 따뜻한 불빛이 하나 둘 켜져 단란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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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불빛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마음은 무척이나 헛헛했다. 새로운 환경에 들뜬 마음의 반대편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그럴 때면 괜스레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향의 공기를 마시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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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집 사이가 멀고 건물과 건물 사이 녹지와 남는 땅들이 많았다. 그만큼 차 없이 다니기에는 튼튼한 두 다리를 풀가동시켜야만 했다.전화나 이메일 말고는 통신 수단이 전무했던 시절, 당시 외로움을 달래며 듣던 노래가 ‘토이’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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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르게 애잔하면서 경쾌한 멜로디와 가성이 섞인 보컬들의 목소리, 그리고 감성적인 서사를 담은 노랫말들은 유학생이 마음을 기대는 유일한 안식처였다.보통은 학교 수업이 끝나고 컴퓨터 실에서 간단히 이메일을 확인하고 버스로 20여분 남짓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동네 마트에서 장을 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숙제와 시험 준비를 하는 게 하루 일과였다. 초반에는 주변 관광지를 짬짬히 둘러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던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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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르게 수증기를 머금은 듯한 스산한 공기, 가을과 겨울의 어디쯤인 것 같은 계절.⠀
스물 셋, 여리고도 불안한 멘탈을 가진 이방인의 지구 반대편 퍼스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노래를 들으며 눈물짓던 날들(feat.나의옛날이야기 /나문희)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오래전부터 일반인의 오디션 경연 프로그램도 즐겨 봤던 터다.
최근 인상깊게 봤던 ‘뜨거운 싱어즈’에서는 내로라 하는 중견 배우들이 모여 합창에 도전한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특정 캐릭터로 분하지 않고 배우 ‘자신’이 되어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는 모습이 신선했다.평소 같지 않게 긴장하고 수줍어 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관전포인트.
합창단원 중 눈길을 끄는 건 80대 여배우 두명이었다. 그녀들이 밝힌 합창에 참가하게 된 동기는 ‘노래를 부르면 행복하기 때문’이었다. 나나 다른 젊은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와 다르지 않았다. 나이를 떠나 행복을 찾아서 나서는 모습이 선한 울림을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선보인 자기소개 무대에서 그녀들이 부른 노래는 마치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 감정이 200% 이입됐다. 극의 캐릭터가 아닌 자기 이름으로 무대에 서 있지만 보는 이들은 ‘배우’라는 페르소나로 볼 수 밖에 없어서 인 것 같다. 그럼에도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는 온전히 평범한 사람의 감정을 보게된 것 같아 미묘한 희열을 느꼈다. 감동적이고 눈물이 흘렀다. 무엇보다 두 배우가 60년 넘게 쌓은 내공의 힘이었으리라. 일생을 바르게 살아온 노년의 어르신에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처럼. 가슴속에 존경과 감동이 일렁거렸다.
https://youtu.be/jy4HibPRJbU
노래를 부르며 울컥해본 경험(feat.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김동규)
합창에 대한 작은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둘째아이가 태어나고 약 4개월의 출산휴가를 전투처럼 치른 후 회사에 복귀했을 때였다. 사내 동호회 중 합창반이 생긴다는 소식에 별 기대 없이 신청을 했다.당시에는 직장에서 퇴근 후에 집으로 돌아가 시터이모님과 교대하고 육아출근을 하는 루틴으로 살다보니 ‘나를 위한 시간’이 전무했다. 출산 후 오래 지나지 않았기에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지만 합창이라면 한번 쯤 배우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번 퇴근후 직원들과 모여 합창을 준비했는데, 그 때 처음 연습한 곡이 ‘10월의 어느 멋진날에’였다.
그리고 합창반에서 다같이 첫 소절을 불렀을 때,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3-4년간 좌충우돌하는 엄마로만 살다가 내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면서
울컥했던 것 같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를 쌓으면서 온전히 내가되는 기분을 오랜만에 누린 시간이었다.
아직도 그 첫 소절의 감동이 남아있는 것 같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하늘이 기분 좋아
https://youtu.be/vX8AxbMOXA4
노래가 주는 천개의 페르소나(feat. 뜨거운 밤은 가고 남은건 볼품없지만/잔나비)
내가 생각하는 좋은 노래란 감정이입이 잘 되는 노래,노랫말이 모두 내얘기 같을 때 몰입되는 노래인데, 오늘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하나의 대상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대상에 대입해도 신기하게도 감정이입이 잘 되는 노래라는 것.
무언가와의 이별, 누군가와의 이별, 어딘가와의 이별을 모두 통틀어 그 공통분모가 되는 감정을 어루만져준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20대부터 곁눈질 하지 않고 많은 걸 바쳐온 곳과의 이별을 앞두고 이 노래를 들으니 또 기가 막히게 기승전결이 들어맞는다는게 놀랍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 없지만’ 이 누군가에겐 연인과의 사랑이요 누군가에겐 젊은시절 힘겨운 도전이요, 또 누군가에겐 순수한 에너지를 쏟은 그 무엇이리라.
좋은노래는 천가지 페르소나를 가진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며
https://youtu.be/hG044Tfz938
원래부터 노래에 소질이 있어던 것 아니지만, 노래를 부르면 감정을 표출할 수 있고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서 좋았던 것 같다. 이제 하드웨어적으로 전처럼 노래를 부를 수는 없게 되니 더 간절해 진다.
그리하여 품게 된 새로운 목표 하나. 80대가 되어서도 노래에 대한 사랑은 잃지 않기. 노래, 나의 끝사랑은 너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