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차 워킹맘의 요리철학
내 노력만으로 작은 성취감와 성숙함을 발견해 나갈 수 있는 종목 '요리'. 내가 요리를 즐겨하는 이유다.
10여년간 워킹맘으로, 파트타임 주부이자 엄마로 요리 경력이 쌓이다보니 나만의 요리필살기가 몇가지 생겼다.
철학이라고 하면 다소 과하다 할지 모르지만, 무엇이든 한 가지에 대해 오래 깊히 경험하고 얻은 진리라고 하면 ‘요리에 대한 철학’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초보라면 말할 것도 없고 특출난 사람을 제외하고는 요리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이다. 그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건 사실상 재료 손질 및 준비다. 일부 오래 삶거나 끓여야 하는 요리를 제외하고는 조리시간이 길지 않다..
각종 야채는 껍질 벗기고 씻어서 자르는 일까지가 공수가 많이 든다. 요리 영상을 보면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가 손질된 재료가 모두 있는 상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채의 경우 미리 껍질을 벗겨 씻어놓거나 아예 잘라서 밀폐용기에 보관한다면 조리 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물론 재료 손질을 미리 하는 것 또한 시간이 드는 일이어서 조삼모사 격이긴 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화려한 색채로 시선을 사로잡는 샐러드는 플레이팅의 비주얼 담당이다. 맛있어 보이는 요리의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색깔에 있다. 샐러드의 단골재료를 떠올려보면 야채와 토마토, 파프리카나 계란, 올리브와 리코타 치즈 등이다. 색깔로 치면 초록, 빨강, 주황, 노랑,검정, 흰색 등 모두가 달라 한 접시에 담아냈을 때 화려하고 있어보이는 느낌을 준다. 한국 요리 중 비빔밥이나 잡채도 비슷한 이유로 비주얼이 좋은 요리다.
원래도 짜게 먹는 식성이 아니었지만 두 아이와 함께 먹는 반찬을 십년 넘게 하다보니 요리의 간을 싱겁게 하는 게 습관이 됐다. 적당한 간, 즉 짠맛은 요리의 화룡점정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햇수로 11년째 요리를 하다보니 간장과 소금의 역할 또한 구분이 된다.
간장의 경우 음식 본연의 간을 좌우하는 먼 짠맛을 조절할 때 넣는다. 소금은 맛을 봤을 때 바로 혀 앞쪽에서 느껴지는 가까운 짠맛을 조절한다. 따라서 볶음 요리는 간장만으로도 마무리가 되지만 깊은 맛이 필요한 국물요리의 경우 간장과 소금까지 넣어야 좀 더 입체적인 간을 만들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때론 간을 보지 않고 국물이나 소스의 색의 농도만으로도 간이 맞는지 짜거나 싱거운 건 아닌지 분별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수십년간 요리를 한 엄마에게서 레시피를 배우려면 계량하기가 어렵다.블로그나 요리책 레시피에 익숙한 우리에겐 큰스푼이나 작은 스푼, 몇 cc 등의 계량이 필요한데 엄마의 레시피는 ‘한 줌’, ‘조금’ 식으로 정확하지가 않기 때문. 아마도 오랫동안 요리를 해온 탓에 눈감고도 재료를 투하하는 내공이 쌓였기 때문이리라.
아직 엄마 만큼은 아니지만 요리를 십년쯤 하다보니 느는 것 중 하나가 눈대중인 것 같다. 국을 끓일 때 재료의 양 대비 물의 양을 적당히 맞출 때나 식구들이 먹을만큼만 요리를 할 때 정확도가 조금씩 높아졌다.
바깥에서 사먹는 음식을 집에서 해봤을 때 가장 격차가 느껴지는 게 MSG맛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미원 등의 인공조미료나 라면스프를 넣는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내 경우 조미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유사하게 간간하고 달달한 맛을 내기에는 ‘멸치 액젓’이 유용하다. 찌개나 국종류, 콩나물 무침 등에도 마지막에 조금씩 멸치 액젓을 넣어주면 감칠맛을 더할 수 있다. 참치 액젓도 무방한 것 같다.
근 5년여간 HMR과 밀키트로 대변되는 간편식의 진화는 눈부실 만큼 다양하게 진행된 것 같다.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다는 컨셉의 간편식들이 하루가 다르게 출시되고 있어 안살 수 없는 지경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음식은 만든 사람의 정성(노고)이나 시간이 들어간만큼 그 맛을 낸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간편식이어도 두번째는 이상하게 맛이 없게 느껴진다. 집밥의 경우 똑같이 하면 비슷하게 만족하는데 간편식은 그게 잘 안되서 롱런하지 못하고 만다. 아쉽게도 요리담당의 노고를 영원히 대신할 수 있는 기술은 없는 것일까?
앞선 말한대로 재료준비시간이 조리시간에 비해 오래 걸린다면 노동의 시간이나 강도로 따졌을 때 요리 후 설거지와 부엌청소가 가장 힘든 것 같다. 하여 설거지감을 하나라도 줄이자는 사명을 가지게 됐다. 집밥 메뉴 중
‘옛날 도시락’의 예를 들면,먼저 계란후라이-햄-김치볶음 순으로 색이 연한 재료에서 진한 재료 순으로 볶아주면 프라이팬은 하나로 돌려 쓰기가 가능하다. 고로 설거지가 간편해지는 장점이 있다. 주방에서의 노동량은 어마어마 하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줄이는 노하우 또한 귀중한 팁이 될 수 있다.
최근 김설 작가의 에세이 ‘사생활들’에서 탐나는 구절을 발견했다.
청소라는 시시한 행위
나는 청소라는 시시한 행위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고 싶다. 시시한 일상을 잘 가꾸는 사람, 요리나 청소 같은 삶의 작은 단위부터 잘 가꿀 줄 아는 사람, 일상을 퇴적시켜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 인생의 의미를 사소한 곳에서 발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사생활들 / 김설 지음)
이 글에서 삶의 작은 단위부터 잘 가꿀 줄 아는 사람이 큰 단위의 일도 성숙하게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살림이라는 외로운 여정에 공허함이 밀려들 때 위안이 되는 구절이다.
나 또한 내가 가장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살림인 요리를 통해서 매일 하루 세번 나를 증명해 보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