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디지털 세상
오늘 은행에 갔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직업훈련과정의 강의를 들어야 해서 '국민내일배움카드'를
신청하기 위해서다.
우편보다 더 빨리 발급받으려면 특정 지점에 방문해야 한다고 해서 기꺼이 시간을 들였다.
요즘은 정말 은행에 갈 일이 일년에 한 두번 정도로 손가락에 꼽힌다. 그러고보면 은행지점과 직원수가 점차 줄게 된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한 70년대생 40대들은 태어나서 아날로그로 20년, 인터넷으로 10년을 살았고, 이후부터 스마트폰으로 갈아탄 하이브리드 세대다. 그래서 필요한 일을 처리할 땐, 원하는 방식을 골라서 쓸 수 있지만 대신, 한 가지에 조예가 깊지는 못하다.
강의 신청이 급했던지라, 이번에는 가장 빠르게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지점방문을 선택했다. 은행문을 열고 들어서서 번호표 키오스크 앞에서 안내원에게 용무를 말하자, 번호표를 뽑아주는 대신 나를 왼쪽 끝방으로 안내했다. 나를 인계받은 다른 안내원에 의해 방으로 들어가보니 사람이 아닌 커다란 화면이 달린 기계가 나를 맞았다. 화면 속에는 ai 상담원이 핏기 없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나갈 때 다시 자세히 보니 내가 들어간 방은 '디지털 데스크'라는 곳이었다.
나와 함께 들어온 안내원은 나에게 신분증을 달라고 해서 스캔해 주고 화상상담원에게 연결해 주더니 안내에 따라 하면 된다고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이윽고 화면에 화상 상담원이 등장했다. 다행히 이번엔 진짜 사람이었다.
'와우, 이렇게 화상상담원을 몇 명만 심어두고 디지털 데스크를 운영하면 정말 직원을 많이 안뽑아도 되겠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또 한번 놀라운 변화였다.
화상 상담원은 몇 가지 인적사항과 서류를 확인하더니 카드 발급을 처리해 줬다.물론 실물카드를 발급받는 것도 바깥에 있는 카드 발급 키오스크에서 처리해야 했다. 체크카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골똘히 생각해봤다.
분명 지점에 방문하기 전에는 사람 대 사람으로 대면업무를 볼 생각으로 왔는데, 실제로는 비대면으로 업무를 봤다. 오자마자 기계로 업무를 보고 기계로 카드를 발급받다니, 이건 아날로그인가 디지털인가? 아니면 그 중간의 어디쯤인가? 완전 디지털이라고 하기엔, 중간에 화상 상담원이 진짜 사람이었으니,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콜라보, 또는 디지로그인 것도 같다.
ai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서비스의 형태 또한 나날히 변하고 있다. 더 편리하고 빠르게, 고객이 원하는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변화하다 보니 고객 입장에서는 따라가기가 벅찬 것도 사실이다.
지금이야, 나처럼 중년이상의 고객들에게는 낯선 방식이라 옆에서 진짜 사람 안내원이 도움을 주는 형태지만,
이 모든 것들이 익숙하게 세팅된 미래에는 하나 둘, 사람들이 사라지는 상상도 해보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중앙에 어느 장소에만 모여있고 서비스 창구에는 오롯이 기계만 존재한다면? 와우, 세상은 아주 커다란 디지털 운동장이 될 것 같았다. 가끔 기계 오류가 생기면 호출버튼을 눌러 '상담원 연결'을 할 수 있는 서비스마저 없어진다면 어떨까? 너무 삭막하고 불편할 것 같다.
요즘은 은행을 비롯한 각종 기업에서 고객상담 업무를 챗봇이나 ai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직 완성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내가 적응을 못해서 인지, 내가 원하는 답을 정확히 듣지 못해 도중에 포기한 적이 많았다. 챗봇 고객상담은 흔히 '찾아가는 길'이나 '영업시간' 등 자주 묻는 질문에 대한 표준 답변을 제시하는 경우에는 곧잘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 외에 디테일한 문의사항들을 처리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은행을 나서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방문 전 내가 예상한 시간에 맞게 원하는 업무를 처리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씁쓸했다. 그동안의 세월이 낳은 낯섦이겠지만,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것 같다.
공급자와 수요자 간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방식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를 통해 주고 받는 방식이란 아직은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한 느낌이 든다. 이런 헛헛함까지 메워줄 수 있는 기술이 탄생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