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장 안에 몇 달 전에 사두었던 생아몬드가 있었나 보다. 모모가 뒤지기 놀이를 하다가 발견했는지 바닥에 내팽겨 쳐 두었다. 하필이면 추워진 날씨에 바닥에 불을 올려놨었는데, 아이코 생아몬드 봉지가 살짝 따땃한 게 걱정이 됐다. 바로 뜯어 볼에 담고 물을 가득 부어 놓았다.
엄마는 내 키가 큰 이유가 다 우유 덕분이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 우유를 하루에 한 통 씩 마셨다나. 거기다 아빠는 밥에 우유를 말아먹는 신기한 식성을 가진 분이셨다. 남들 햄버거에 콜라 마실 때 나는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우유 사랑은 꽤 대단했던 것이다.
그런 내가 아몬드 밀크를 먹어보고 싶었던 이유는 우유가 건강한 식품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쳐서였다.
마트에는 볶은 아몬드만 팔아서 생아몬드는 인터넷에서 주문해야 했다. 채식주의자들이 우유 대신으로 견과 우유를 먹는다는데 시중에 파는 건 첨가물이 많이 들어가서 사기가 꺼려졌다. 그래서 한번 만들어보자 하고 주문했는데 그게 벌써 몇 달 전이 되었다. 볶은 게 아니니까 산화는 덜 되지 않았을까, 신선도보다 산화가 더 무서운 거 아닐까 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물에 불린 아몬드를 곱게 갈아 꾹꾹 짜내면 우유 색깔과 거의 똑같다. 한 모금 꿀꺽. 나는 고소하다 말하고 남편은 물맛이라며 고개를 휘휘 젓는다.
우유 대용품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우유맛은 아니다. 누군가 우유를 먹지 않기로 했는데 정말 간절히 먹고 싶을 때, 그때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다. 근데 그럴 때는 그냥 우유 한 잔 마시면 안 되는 건가. 나는 엄격한 식생활은 못할 것 같다.
아가베 시럽을 조금 뿌렸다. 우유가 빠졌으니 시럽은 조금 관대하게 뿌려도 되겠지, 왠지 위안이 돼서 많이 넣었나 보다. 달달해졌다.
나는 꾸준히 직장을 다니는 사람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회사에 가기 싫어!’라고 말하는 순간, ‘하! 난 그래서 그만뒀지!’라고 생각하며 어깨가 올라간다.
물론 하기 싫은 일을 꾸준히 하는 것도 능력이고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안다. 그래도 상대방이 못하는 다른 선택을 했다는데 위안을 얻는 걸까, 슬프지만 뭐 그런 거 같다.
나는 언제나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일부러 다른 걸 찾는 건 아닌데 어째 매번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게 된다.
산골행도 그중 하나인데, 서울에서의 삶이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리는 항상 아팠고 걱정했고 불안했다.
그래서 다른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주거지를 선택하는 일이 아몬드 밀크를 만들어 먹는 것처럼 그냥 한번 해볼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다는 건 알지만 처음에 산골행을 결정했을 때 우리 부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살아보고, 아니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도 좋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의 아몬드 밀크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아몬드 밀크처럼 그 맛이 다소 밍밍하고 생소하다. 그런데 거기에 시럽도 조금 뿌리고 미숫가루도 타 먹고 라떼도 만들어먹는 재미에 우리는 점점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