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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바 May 25. 2020

컨트롤 제트를 누를 수 없어

   컴퓨터에는 '실행 취소', 일명 ‘컨트롤 제트’가 있다. 컴퓨터로 글을 쓸 때는 많이 쓰이지 않는 것 같지만 컴퓨터로 디자인을 할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기능이다. 내 경우에는 대학에 다닐 때 디자인을 잠시 건드려본 경험이 있어 지금도 종종 디자인 작업을 하는데, 농장 간판 만들어 주기, 내가 참여하는 모임 포스터 만들기 정도가 가능하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 보면 거의 항상 손가락이 컨트롤 제트 위에 올려져 있는데, 그은 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가락을 한 번 까딱 움직이면 된다. 그럼 선을 긋기 전으로 돌아간다.


   그런 기능이 절실히 필요한 지금 나는 머리를 '블루 루인'색(영화 <이터널 선샤인> 여주인공의 머리색인 파란색)으로 할지 말지 하는 고민을 한 달째 하는 중이다. 이 나이 먹었지만 태어나서 머리색을 바꿔보는 건 처음인지라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지금 내 머리색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못 하겠고, 그러다 누가 금발을 하고 지나가면 저 색도 예쁘네 혹했다가, 이내 안 그래도 없는 머리숱 다 빠지진 않을까 걱정하는 패턴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이렇게 한 달 동안 파란 머리 생각만 하다 보니까, 뛰기도 전에 준비운동하다 발목 접질리는 꼴이 될까 우스워졌다.


   흔한 말로 ‘후회할 거 해보고 후회하라’라는 말이 있는데, 머리를 파랗게 물들여서 내가 후회할 일은, 색이 마음에 안 들던가 머리가 심하게 상하던가 그 정도 아닐까. 아 물론 이것들은 돈이 아까운 거지 누군가의 마음이 상한다던가 하는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돈이 아깝다고 환불해주세요 할 수도 없으니 그럴 때는 그냥 ‘나 참 잘했다’ 해버리자.

   고민만 하다 팔십 할머니가 돼서야 ‘지금이라도 블루 루인으로 염색해볼까’ (그때 되면 탈색은 안 해도 되겠다만)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물론 팔십 할머니도 파란색 머리 하셔도 괜찮습니다만 제 말은, 그때까지 (앞으로 50년을) 할까 말까 피곤하게 고민하는 것 보다 낫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입니다.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쿨하게 들리지만 사실 모든 상황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

   ‘너무 말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사람은 없지만 너무 말해서 후회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는 걸 꽤나 즐기는 편인데, 대체로 말을 잘 가려서 하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이 말을 해야 할지 아예 말을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유용할 것 같은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을 입력하면 상대방의 반응을 시뮬레이션해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으면 어떨까.

   가령 남편이 오늘 저녁은 자기가 책임진다며 호기롭게 주방으로 들어갔다고 하자. 한참 지지고 볶다가 다 됐다며 나를 부른다. 아, 버터 묻은 나이프는 설거지통에다 담가 놓으면 안 되는데, 음식물 쓰레기가 싱크대에 그대로 있네, 그런 게 더 신경 쓰일 때, 그럴 때는 핸드폰을 켜고 음식 사진을 찍는 척하며 남편에게 하고 싶은 충동이 드는 그 말을 애플리케이션에 입력해 본다. 아마 다 입력하기도 전에 ‘이게 뭐가 중허냐, 밥이나 먹자.’ 그러지 않을까.



   나는 말을 뱉기 전에 머리를 많이 굴리는 덕에 큰 말실수는 하지 않는 편이지만 의외로 가벼운, 일상적인 말들을 하면서 ‘아, 이 얘기는 좀 아닌가’ 하는 순간들이 종종 생긴다. 시답잖은 농담을 한다던가 너무 내 얘기만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신이 나서 이야기하다가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한 말을 곱씹는다. 한 30초에서 1분쯤. 그러다 곧 ‘에잇, 나는 아직 이 정도로구나’하며 체념해버린다. 코미디언처럼 세련된 농담을 못했더라도 법륜스님처럼 무릎 탁 치는 조언을 못해줬더라도 ‘나는 나니까 어쩌면 그 사람들처럼 못하는 게 당연해’라고 생각해버리면 마음이 편하다.



   우리 아이의 경우에도 실수를 했을 때 붙잡고 길게 잔소리하면 속만 상하고 화만 난다. 오히려 “하면 안 되는 거야. 다음엔 그러지 마.”라고 간단하게 말하면 아이는 큰 반항 없이 “네” 하고 대답한다.

   나는 아이가 ‘나는 몰랐어, 다음에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러지 않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다음번에는 좀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미용실 가기 전에 컴퓨터로 머리에 블루 루인색을 칠해봐야겠다. 어울리려나, 안 어울리면 실행 취소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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