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를 라푼젤이라고 불렀다.
25살의 나는 서울에 살며 낮에는 시나리오를 쓰고 밤에는 호프집에서 일했다. 호프집은 2층짜리였는데, 밤 10시가 되면 나는 행주 한 장을 들고 2층 가는 계단을 올랐다.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밟고 소주 모델의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벽을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홀로 들어가는 문과 창문이 하나 나왔다. 나는 창문 앞에 멈춰 섰다. cctv의 사각지대, 사장은 화면 속에서 나를 찾다가 이내 담배 한 대 피고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담배 냄새와 탈취제, 그리고 자동차 배기가스가 오묘하게 섞인 2층 창문 앞에서 나는 매일 10시 누군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너를 돌아 그가 나타났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그곳에, 그 시간에 나타날 거라는 걸. 일을 마치고 지하철 타러 가는 길이 아닌 일부러 빙 둘러 내가 있는 곳으로 지나갈 거라는 걸. 그는 그렇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 환한 미소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뜸 노래를 불렀다.
“창문을 열어주오”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를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그 카페는 친동생이 바리스타로 일하는 곳이자 내가 낮에 시나리오를 쓰러 가는 곳이었다. 동생은 내게 직원용 공짜 커피를 슬쩍 내주곤 했다. 그는 그 매장에 새로 온 점장이었는데, 그가 처음 왔을 때 나는 동생에게 물었다, 점장 어땠어, 권력자를 새로 맞은 말단 직원을 위로할 형식적인 질문이었을 뿐인데 동생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괜찮다고. 내 인생에 ‘괜찮은’ 점장은 없었는데,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하루 종일 마셔도 될 만큼 잔에 가득 담긴 커피를 홀짝이며 글을 쓰는 둥 마는 둥 그를 훔쳐보았다. 단정하고 조금은 귀여운 차림새에 동글한 얼굴, 맑은 눈망울을 가진 사람. 그는 차분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동생에게 그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동생은 단칼에 거절했다. 괜히 소개해줬다가 잘 안되면 같이 일하는 자기만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 그것도 그럴 것이, 나는 25살이었지만 번듯한 직장도 없었고 3평 남짓한 고시원에 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으며 거기다 준비하는 영화로 앞으로 먹고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런 게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오직 그를 만나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뿐이었다. 나는 아직 어렸고 결혼을 생각할 나이도 아니었다. 가볍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의 끈질긴 요청에 동생은 결국 그에게 내 번호를 넘겨주었다. 그와 몇 차례 메시지를 주고받고 만날 날짜를 잡고 나서야 나는 소개팅에 입고 갈 옷도, 찍어 바를 화장품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대책 없이 달려들곤 한다.
나는 언제나 연애 상대 찾기를 좋아했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기준은 상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형상을 가지고 있는가였다. 겉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면 나는 금세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가 여자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었고 내 기준에 아름다운 사람이면 되었다. 그 기준은 본능적인 것에 가까운데, 지금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아름다움을 보며 드는 황홀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첫눈에 잘 반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움—그것이 외면이든 내면이든—에 남들보다 예민하게 감동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감정을 잘 못 숨긴다. 좋아하는 감정은 더 심했다. 빨리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한 번은 옆에 있던 선배가 “너 티를 너무 낸다.”라며 놀린 적도 있었다.
네가 좋아, 따라다니며 헤벌쭉 웃을 줄만 알았다. 순정만화에서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 나랑 사귀자, 말하더라 그래서 나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나는 몰랐다. 왜 나는 그와 사귀어야 하는지, 사귄다는 건 무엇인지. 20대의 내가 아는 거라고는 순서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사귀자, 손잡자, 입 맞추자. 그건 쉬웠다. 다들 그것을 기대했다. 육체적 사랑은 경험이 쌓여갈수록 알게 되었지만 다른 것은 여전히 어떻게 하는지, 다른 것이 있기는 한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누구도 내게 보여주지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3 때 나는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함께 미술학원에 다니던 동갑내기 남자애가 있었는데 키도 크고 잘생겼는데 노래도 잘 불렀다. 나는 그에게 반했고 내가 좋다는 티를 너무 많이 내서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하루는 내가 목감기로 앓아누웠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 아무것도 못 먹고 어두운 자취방에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콜록대며 누워있었다. 사귀고 있던 남자애에게 문자를 했지만 그 애는 ‘원래’ 답을 잘 안 한다. 밤 11시 학원을 마칠 시간 그 남자애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다. 필요한 게 있냐고 묻기에 편의점에서 죽을 사달라고 했다. 얘가 웬일이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생각지도 않은 호의에 가슴이 뛰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보러 온다니 아픈 몸을 일으켜 정리도 하고 환기도 시켰다. 그런 순간에는 진통제라도 맞은 듯이, 다 나은 것 같이 가벼워지지 않나. 문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오는 길에 편의점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근처에 24시간 불 켜진 편의점이 몇 군데 생각났지만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싫은 소리를 하면 그는 나를 떠날 것이다.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와 준 것만으로도 좋았다. 나는 늘 불안했고, 매달렸고, 상처 받았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그렇다고 그가 내게 못할 짓을 했다는 말은 아니다. 나도 내 외로움에 그 사람들을 이용한 거니까. 우리는 무지한 이용자들이었다.
나를 라푼젤이라 부르는 이 사람은 나와 소개팅을 마치고 인사를 하고 각자 길을 걸은 지 3분 만에,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또 만나고 싶어요,라고. 그는 나에게 옷을 사주고 먹을 것을 사주고 하루 종일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가 메시지를 보내면 대게 1-2분 안에 답장이 왔다. 함께 밥을 먹을 때 이 사람은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궁금해했고, 내가 뭘 먹고 싶어 하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매 순간 내 기분이 어떤지를 세심하게 살폈다.
누군가와 사귈 때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은 게 처음이었다. 나는 조금씩 육체적 사랑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갔다.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기쁨, 인정받는 기쁨,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는 기쁨.
하지만 이내 불안해졌다. 이러다 갑자기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그가 언제든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만나온,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나를 상처 주어서 내가 떠나지 못했던 그 사람들처럼. 메시지 답장도 늦게 하고, 좋다는 표현도 줄였다. 한번은 같이 일하는 남자와 새벽 4시에 근무를 마치고 밥을—술을 곁들인—먹으러 갔다가 6시에 출근하는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물론 동료와 같이 술 한잔 먹을 수 있는 일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나의 그런 행동을 싫어한다는 걸. 그날 그 사람은 평소 답지 않게 무표정이었다. 상처 받았구나. 가슴이 저릿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이렇게 해야 그가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서도 나는 그에게서 받는 사랑이 너무 커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얼마나 관계의 혼란 속에 있었느냐면, 나는 그를 잡아놓기 위해 그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내 몸뿐이었다. 그게 어쩌면 그를 묶어둘 수 있는 나의 묘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만난 지 한 두 달쯤 지났을 때—우리는 거의 매일 붙어있었기에 더 긴 시간을 함께한 것처럼 느껴졌다—나는 그에게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고 말했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날 무렵부터 결혼하자고 말했다.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사와 자취를 하며 나와 살았고 20대 내내 밖을 떠돌았다. 안정된 직장은 없었으며 별의별 고된 일은 다 해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저 스쳐 지나갔다. 일로 만난 사람, 잠시 입을 맞춘 사람, 연애 놀음. 내 삶에 들어왔지만 그대로 빠져나간 사람들. 그런데 이 사람은 달랐다. 내 삶에 들어왔고, 내게 사랑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나는 이 사람과 함께 뿌리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예스맨이던 그는 내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말이 없어졌다. 돈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돈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는 그래도 안된다고 말했다. 그가 야속했다. 결혼식은 내게 허례허식이었고 집은 둘이 같이 벌어서 마련해도—그게 내 집이 아닐지라도—괜찮았다.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결혼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울었다. 나는 납득하지 못했다. ‘돈이 필요 없고 집도 필요 없고 우리는 서로 좋아하니 결혼을 하는 건 가능하다.’라고 나는 아주 단순하고 이성적인 명제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나는 그에게 ‘깨어있는 신여성’이었고, 그는 나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선뜻 결혼하자고 말할 수 없었고 그런 자신을 내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나의 일기 한쪽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그를 비난했다가 또 이해해보려 했다. 주변에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도 방법을 알려주는 이도 없었기에 나는 계속 적는 일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본가에 갔다가 우연히 그때의 일기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한 장 한 장 투박하고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져 숨이 턱 막혔다. 절망과 이해받지 못함, 시도와 좌절을 나는 매일 써 내려갔다.
그러다 여느 때와 같이 일기를 쓰던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결혼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그 사람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자란 남자이다. 평생 그가 들어온 이야기들은 내가 들어온 것과 달랐다. 남자가 집을 못해오면 능력이 없는 거고, 부모님은 남의 잔치에 내신 돈을 거두셔야 하고, 가장으로써—경제력이 없는 나를—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를 한껏 짓눌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말들을 내게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는 매번 돈이 없어서 안된다고 했고, 나는 돈 없어도 하면 안 되냐고 울부짖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내는 방법을 몰랐고, 나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몰랐다.
이때의 깨달음은 내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25살쯤 되었으니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데 그 방법을 몰랐다.
그 당시 내게 시나리오 작업은 뒷전이었고 나는 모든 에너지를 그와의 관계에서 답을 찾아가는데 집중했다. 그를 내 삶에서 놓치지 않을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그 당시 나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나는 대학입시로 고등학교 때부터 멀어졌던 책 읽기를 10년 만에 다시 시작했다. 내가 살던 낙성대역 지하철에는 무인 도서 대출기가 있었다. 미리 신청하면 책을 받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정거장만 가면 서울대역이었고 동사무소 한편에 작게 붙어있던 복층짜리 도서관이 있었다. 언제나 공부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그곳에서 나는 도서대출증을 발급받았다. 이때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이 미숙한 시작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주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내 삶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게 사랑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주었다.
그것은 나를 더 조화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포근하고 강력한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