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은 나처럼 안 키울 거야"
첫째를 낳기 전에 입버릇처럼 했던 말.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좋았던 기억보다 내가 했던 부끄러운 말실수나 비정한 행동이 먼저 떠오른다. 내게 ‘당했을’ 운 없는 사람들 생각에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가끔 그들이 꿈에 나오기도 한다.
고등학교 1학년, 우리 반 아이들은 수련회 장기자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열댓 명이 열을 지어 유행 가요에 맞춰 춤을 추기로 했다. 삼각형 모양의 대열을 만들고 중심에는 반장이 서기로 했다. 반장이 춤을 추면 아이들은 그렇게 재밌어했기 때문에 그 아이가 중심에 서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사건은 반장이 자기 친한 아이들을 마음대로 자신의 바로 뒤, 즉 무대 앞쪽에 세우면서 시작됐다. 나와 내 친구는 잘 보이지도 않는 맨 뒷줄로 밀려났다. 나는 앞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앞에 서고 싶다고 하면 속이 빤해 보이는 말 같아서 친구를 앞세워 반장에게 따졌다. 이건 옳지 않다고, 나는 앞에 서지 않아도 되니 내 친구는 세워달라 강하게 요구했다. 반장이 내게 뭐라고 반박했는지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그럴싸한 반박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논리적으로 반박했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리는 없다. 나는 논리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반 아이들 모두가 자습을 하는 시간 동안 나는 내 뒷자리에 앉은 반장에게 끊임없이 따졌다. 한 시간쯤 됐을 무렵, 반장은 울음을 터뜨렸다. 문득 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울면 지는 거’라고. 그날 나는 원하는 것을 얻어냈고, '이겼다’.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아버지는 당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셨다. 꾸며낸 예를 들면 드라마를 보면서 어머니가 ‘저런 예쁜 옷 입고 사는 사람은 좋겠다’라고 하면 아버지는 이렇게 대꾸했다. ‘촬영한다고 다 협찬받은 옷인데 뭐, 실제로 저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나. 나는 저런 옷 입고 다니는 사람 이해가 안 된다’라는 식이었다. '그러게, 예쁘네.' 한 마디면 될 것을.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말에 동조하는 일이 많았다. 강하게 자기 의견을 말해서 '이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나의 말하기 방식은 아버지를 닮아갔다.
나는 당당했지만 겸손하지 않았다. 어딜 가서 무얼 하나 사람들과 연을 끊는 것으로 끝이 났는데, 나는 내가 왜 그런 사람들만 만나는지 참 운이 없다 생각했다. 20대 중반쯤 되니 나는 사람들과 부딪히는데 이골이 났다. 그쯤 나는 남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둥글둥글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온통 뾰족하게 모난 사람이라는 걸.
임신을 준비하며 보던 책에는 ‘어릴 때 많은 것이 결정된다’ 같은 부모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한 글이 많았다. 책 속의 아이들은 내게 없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런 걸 받지 못했지. 더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외롭고 서러워서 누구든 붙잡고 따져 묻고 싶었다. 왜 나를 이렇게 키웠느냐고.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며 깨달았다. 부모의 역할과 책임이란 건 분명히 있지만 그걸 제대로 했는지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나의 어린 부모는 열심히 살았지만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잘못을 묻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건 정당하지 않았다.
불안 속에서 스펙 쌓듯이 가치관을 쌓아나가다
나는 경쟁 속에서 자라났다. 나는 시골학교에서 1등을 한 번도 못한 2등이었고, 고등학교에서는 ‘우등반’에 있다가 ‘열등반’으로 떨어진 낙오자였다. 수능을 앞두고 ‘예체능’을 선택한 이탈자였으며 지방 대학에 진학하고 그마저도 중퇴한 ‘고졸’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내가 알고 있는 답을 가르쳐주면 나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까 모른 척하기도 하고, 공부를 잘하는데 선생님에게 예쁨까지 받으면 질투가 폭발했다. 남보다 더 잘난 이력을 만들고 싶어 어릴 때 잠시 미국에 거주했던 경험을 들춰내며 “나 미국에서 살았어, 아기 때여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이라는 말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나는 뭐가 그렇게 불안했을까.
성인이 되어서 많은 일을 해봤지만 처음 시작할 때의 두근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보니 생각보다 별로였거나 재미가 없으면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맞는지, 시간 낭비하는 건 아닌지, 더 늦기 전에 그만둘지를 매일같이 고민했다. 의심이 든 순간부터는 나에게 흘러오는 모든 단서들이 내가 이 일을 그만둬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 그만두기를 참 많이도 반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안을 뒤좇아, 해보고 싶은 것을 많이 해봤다. 불안이 나름의 촉매제 역할을 한 셈이다. 대학도 다녀보고 회사에서도 일해보고 혼자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영화도 찍어보고 연애도 해보고. 5년 동안 바쁘게 살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앞으로 살아갈 날을 구상했다.
그러다 25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나의 첫 번째 타인이었고—가족을 제외한—그와의 만남은 내 가치관이 바뀌는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나는 결혼 생각이 없었다. 나는 독신주의였고 남자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한 불신과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따뜻함으로 안아주었고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전의 만남들은 사랑이 아니었구나. 마치 20년 넘게 만성 소화불량과 위병을 알아온 내가 채소 중심의 식이요법으로 바꾼 뒤 생전 처음으로 편안한 속을 느끼고 위가 원래 이런 느낌이었어?, 하며 화들짝 놀랐던 것과 같은 깨달음이었다. 그를 만나 나의 세계는 조금 더 넓어졌고 그 속에서 공감과 사랑을 발견한 나는 생각을 바꿔 결혼을 선택했다.
두 번째 가치관의 변화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일어났다. 아이들에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주고 싶었다. 하루 종일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 공부하고 수련까지 해야 했다. 안된다는 말을 해도 되는지, 아이가 떼를 쓸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화는 어떻게 줄이는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주려면 먼저 내가 그것을 가져야 한다. 또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나은 것으로 바꿔야 한다. 매일매일 내게 감당하기 힘든 과제들이 던져졌다. 아이들이 잠들면 나는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책을 읽고 강의를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다 큰 성인들과 함께 하는 것보다 특별히 더 쉽거나 더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은 나의 실수에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니 나는 화냈다가 울었다가 감동했다가 그러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마지막 세 번째 변화는 공동체 실험을 하며 일어났다. 이때 나는 가장 치열하게 나 자신 그리고 타인과 부딪혔다. 5명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은 모두 내게 새로운 세계였다.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해주었던 남편과 아이들과는 또 다른 타인이었기에 깨달음의 종류나 범위가 달랐고 그 너비 또한 넓어졌다. 결혼생활과 육아 5년 차에서 이뤄낸 변화만큼 혹은 그 이상을 1년 단기 속성 과정으로 들은 느낌이었다.
나는 불안 속에 살면서 스펙을 위한 새로운 자격증을 따는 것처럼 새롭고 매력적인 가치관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이기려 드니까 그렇지
삶의 가치관이 바뀌더라도 어떤 것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이다. 나의 경우는 습성이 되어버린 행동방식이 그런데, 흔히 머리는 알지만 가슴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답답함이 거기서 온다. 가치관이 머리로 아는 것이라면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은 가슴이 아는 것이다.
나에게는 가치관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는 두 가지 습성이 있는데 하나는 경쟁 습성이고 하나는 과묵함이다.
나에겐 ‘이겨야 한다’는 경쟁 습성이 있다. 이 사실을 나는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 이유는 내가 느림을 추구하고, 경쟁은 거부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체 실험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분석하던 중 나는 내가 당당함을 넘어선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을 살펴봤다.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내 말은….”
이 문장들 앞에는 좋게 말하면 (당당하게) 나쁘게 말하면 (공격적으로)라는 지문이 들어간다. 주로 (강인하고 빠른 속도)로 이야기하는데, 당당함과 공격적인 말의 차이는 어조보다는 쓰는 단어들로 구별된다.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는 “해야 한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보다 도발적이다. do 보다 should do인 셈이다. 정답이 있다는 말.
또, 끊임없이 내 말을 하며 내가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보인다. 나는 내가 말한 만큼 상대의 말도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들은 게 아니었다. 그저 입 다물고 머릿속으로 반박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나 스스로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잘하는 말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은 달랐다. 나는 논리적으로 말하기를 잘했지만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말은 잘 못했다. 보통 수다는 쉽고 토론이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그 반대였다. 수다가 너무 어려웠다.
내게 타인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만나기 두려운 존재였다. 어릴 때는 모르는 게 많았다. 동네 할머니는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랜만에 만난 사촌과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밥을 얻어먹고 설거지는 끝까지 내가 한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괜찮다고 하면 안 해도 되는 건지. 알지 못해서 실수할까 두려웠다. 나는 원래 말이 없어, 라는 말로 불편한 상황을 외면했다.
내가 과묵한 이유는 침묵의 진리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말로 인해 서로가 받을 상처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편했다. 그런데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나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영화처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상상하도록 만들고 자유로운 해석을 유도하는 꼴이 되었다. 영화평론가가 자기 입맛에 맞춰 해석을 하고 대중에게 보여주면 어느새 나의 영화는 그런 영화가 된다. 뒤늦게 감독의 변 같은 걸 내보내 봤자 대게 사람들은 기존의 해석을 고수한다. 대중들은 다음 작품도 또 그다음 작품도 모두 의심의 색안경을 끼고 관람한다.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도대체 이 영화의 기획 의도가 뭡니까?”라고 말이다.
그러면 나는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설명해야 할까. 그건 또 매력이 없다. 진실은 안중에 없고 나를 오해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나의 공격성과 연결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프롤로그처럼. 어쩌면 그 사람들은 나의 공격성에 상처 받았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받은 상처가 너무 아파 나에게서 신뢰를 거두었고 내 모든 언행을 의심하기로 마음먹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개연성이 있는 전개이니 감독이 억울하기만 한 일은 또 아닌 것이다.
내가 만들어 가는 나
경쟁이 답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내가 옳다는 걸 인정받는 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님을 안다. 말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걸 안다. 변해야 하는 걸 안다. 머리로는 안다. 변한 삶이 더 좋은 것 같은데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서 그런가?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언제든, 어떤 환경에 있든 변할 수 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갈등이 생겼을 때 변화가 있길 바라지만 적절하게 행동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남 탓하기, 내 탓하기 그리고 외면. 남 탓하기와 외면이 가장 많은데, 하기 쉽기 때문이다. 남 탓도 정당한 남 탓이 있고 내 탓도 건강한 내 탓이 있다. 대체로 남 탓은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하기가 쉬운 반면에 내 탓, 특히 건강한 내 탓은 하기로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그러려면 나를 들여다보고 내 안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럽다. 만일 찾더라도 내가 변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살던 대로 살래',라고 마음먹고 만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원래' 과묵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대게 할 말이 많고, 기분이 좋을 때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목청껏 노래도 부른다. 춤추고 노래하는 우리 집 아이들을 보며 사람들은 누구 닮아서 그러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남편과 눈을 맞추고 피식 웃는다.
나는 그런 사람인데, 내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그저 상처가 무서워서라면 나는 내 태도를 바꿔보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기로 했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왜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기 위해 나를 바꿔야 하지? 이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에게 화술은 수단이다. 나의 말을 잘 전달하는, 그래서 결국엔 내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할 수 있다면 나를 바꾸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하나씩 새로운 것을 배워갔다. 할머니라는 호칭보다는 어머니나 어르신이 더 정감 있게 느껴진다는 것. 사촌도 나를 오랜만에 봐서 무지 어색할 테니 근황이나 취미에 대해서 물어보면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설거지는 사람마다 다른데, 내가 한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다음에 오면 하라는 사람도 있고 내 집이니 내가 하겠다는 사람도 있다는 것.
말도 사람들에게서 많이 들어야 배운다. 상냥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며 그의 말을 배우고 진심을 얘기하는 사람을 보며 따뜻해지는 가슴을 기억한다.
듣는 것만큼 말하기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기뻐하는지 어떤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불편해하는지 알 수 있다. 기뻐하는 말과 불편해하는 말은 사람마다 달라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것이 있어서 상대가 기뻐하는 말을 발견했다면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불편해했다면 사과를 하고 목록에서 제외하면 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비교적 쉽다. 진짜 어려운 과제는 내가 믿어 왔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바꾸는 일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 나는 잘못이 없다는 믿음, 그 모두를 버려야 했다. 내가 30년 간 고집해 왔던 '옛 자아'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책을 덮기도 하고 '이렇게 까지 해야 돼?' 의심이 들면 다시 경로를 바꿔 다른 길로 갔다가도 결국 다른 길은 없구나 깨닫고 돌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마음속 깊이 변화를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쓴 정신과 의사 스캇 펙은 ‘죽음의 고통이란 탄생의 고통이고, 탄생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다. 우리가 새롭고 더 좋은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 등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옛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 등이 죽어야 함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 항상 이겨야 한다는 욕망을 포기하는 동안 나는 우울했다. 사랑한 어떤 것을 포기하는 데 따르는 감정, 적어도 내 일부분이고 나와 친근한 것을 포기하는 데 따르는 감정이 바로 우울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은 당연히 성장해야 하고, 정신적∙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옛 자아를 포기하거나 상실하는 것이 필수 과정이므로 우울증은 정상적이고 근본적으로 건강한 현상이다.
—M. 스캇 펙
변화에는 금단현상이 따라왔는데, 스캇 펙은 이를 '정상적으로 건강한 우울증'이라고 표현했다.
한날은 자정에 잠에서 깼다. 수련으로 마음이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우울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참 온다 간다 말도 없구나. 가만히 있으니 점점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기에 벌떡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참 쓰다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4시가 넘었다.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이 내가 보내 놓은 메시지—'우울하네. 괜찮아요, 지나갈 거야'—를 읽고 내가 있던 서재의 문을 열었다. 나는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우울감이 많이 사라졌지만 남편이 아무 말없이 꼬옥 안아주는 호사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나도 아무 말 않고 포옥 안겨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우울함에는 포기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으로서 금단현상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만,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또 아플 것을 생각했을 때 금단현상보다는 더 상냥한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성장통. 아플 때마다 나에게 "크려고 그러는 거야." 이야기해주려고 말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 영향도 없다”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미숙했던 부모, 경쟁을 사랑한 대한민국 사회, 그리고 나에게 시련을 주는 타인들 그 어떤 것도 지금의 나를 결정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앞으로의 나는 내가 만들어간다. 성장통을 겪으며 잘하고 있다 위로하며, 용기를 내어 변화해 나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