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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바 Oct 09. 2021

호박전, 부추전 그리고 커피

    우리집 두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는 '하원 문화'가 있다. 시간에 맞춰 부모들이 삼삼오오 마당으로 모여든다. 아이들을 맞이하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들은 마당 한켠에 놓인 평상에 가방을 벗어두고 마당 한가운데 솟아있는 흙동산에 오른다. 부모들은 평상에 앉아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다른 부모들과 이야기 꽃을 피운다. 내가 사랑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한 날은 어째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한 엄마, D는 전과 같지 않게 기운이 없어 보이고 말수도 줄었다. 전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경쾌한 말투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하루 전에 있었다. 전날 저녁 어린이집 부모가 모두 모여있는 대화방에서 D가 한마디 했다. 

    “불편하네요.”

    대화방에 올라온 사진 때문이었는데, 그 사진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건 불필요하니 생략하겠다. 내가 놀랐던 부분은 그의 말에 사람들이 침묵했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서 안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몰라서 아무 말 못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후자로, 아는 게 없어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사람들이 왜 침묵하는지 잘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편견 없이 상황을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D의 말이 구조신호처럼 들렸다. “내 말 좀 들어봐 주세요." 사람들은 방법이 없을 때 불특정 다수를 향해 "도와줘." 소리치기도 한다. D는 사람들의 무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예상하고도 어쩔 수 없었을까.

    식어버린 수프에 생긴 질긴 막처럼 사람들은 침묵으로 D를 덮어버렸다. 대화방에서도,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꿈이라도 꾼 걸까 의심할 때쯤 몇몇이 모여 D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잘못 본 건 아니구나 안심했다. 하지만 그들도 마땅한 수가 없었는지 혹은 그냥 아무 일 없는 척하고 싶었는지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D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D와 이야기'가 필요한데 말이다.

    D의 목소리가 구조신호로 들린 것은 나뿐이었나! 내가 누군가를 구하려는 대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일 모두가 그의 메시지를 '도와줘'라고 읽었다면 방관자 효과처럼 모두가 들었으니 누군가 도와주겠지,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분노로 해석한 것 같았다. 도와달라는 의미로 들은 사람이 나뿐이라면 어쩌지,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침묵의 표면 아래에 갇혀 숨 막혀하고 있을 D가 떠올랐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나설 것이다. 내가 막을 모두 걷어내고 그를 표면 위로 끄집어내는 일은 할 수 없지만 작게 숨구멍을 뚫어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커피 한 잔 마시자고 청했다.


    평소에 내가 본 D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린이집을 제 집처럼 아껴 필요한 물건을 제 돈으로 사 오기도 하고 선생님들도 살갑게 챙겼다. 아침에 아이들이 하나밖에 없는 초록색 클레이로 다투며 노는 장면을 보고 그날 오후에 대여섯 색상의 클레이를 사들고 오는 사람. 그는 세심하고 베풀 줄 알았다.

    “새로 오신 급식 선생님, 아직 부모들이랑 정식으로 인사도 못했잖아요. 쓸쓸해하실까 봐 환영 선물 하나 챙겨드렸어요.”

    “등원할 때 일부러 급식실 앞까지 가서 아이랑 함께 인사하고 반으로 들어가요.”

    이야기를 나눠보니 내가 알던 것 이상으로 그는 사람들을 챙기고 있었다.

    “저는 그렇게 할 생각을 전혀 못했는데. 선생님께서 좋아하셨겠어요.”

    나는 진심으로 감동해서 말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어린이집에 이렇게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 그가 왜 “불편하다”라는 말을 했는지 이유가 무척 궁금해졌다.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차분히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서운하고 미안하고 아픈 마음이 느껴졌다. 그의 감정에 과몰입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도 했다. 나는 그가 사람들이 많은 대화방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구조신호였다.


    그런데 왜 불편한 상황까지 갔을까? 사람 간의 일에는 분명 작은 오해들이 있을 것이고 나는 한쪽의 이야기만 들었기 때문에 진실은 모른다. 진실을 탐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이번 일은 내 몫이 아니다. 내가 그날 D를 만난 건 진실을 찾아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의 말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말에 공감함으로써 그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D와의 만남이 있었던 날 오후, 아이들 하원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으로 갔다. 마당에는 엄마 한 명이 호박전을 굽고 있었다. 다른 엄마는 갓 태어난 아기를 둘러업고 버너와 부추전 재료를 바리바리 싸왔다. 호박전을 굽는 엄마가 느긋하게 호박이 노릇노릇 익기를 기다렸다 뒤집고 기다렸다 뒤집어 커다란 스텐 쟁반에 펼쳐놓으면 어느새 아이들이 달려와 흔적도 없이 먹어 치웠다(나도 한몫했다). 추석도 곧이고 가을이구나 생각했다.

    한참을 굽고 있으니 D도 아이를 데리러 마당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오전 만남을 기억하며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좀 더 끈끈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D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으로 평상 한쪽 끝에 자리 잡고 앉았다. 와서 전 좀 먹으라며 손짓하자 그가 쭈뼛쭈뼛 다가와 앉았다. 그때 말없이 느긋하게 호박전을 굽던 엄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먹고 기분 풀어요.”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은 호박전과 부추전이 D를 위한 선물이었다는 것이다. 전을 준비한 두 사람 모두 그때는 아무 말하지 않아서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컨텐츠는 좋지만 홍보를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무심하게 혹은 은근하게,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D를 위로하고자 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D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은 우리 세 사람 모두 같았다(물론 우리 말고도 D에게 이야기를 건네 준 사람들이 있었고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어떤 방법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답은 없고 하나의 마음만 있었던 그날. 나는 기쁨과 경이로움에 전율했다.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본 것이다.


    나는 D의 말에 사람들이 왜 침묵하는지 아는 건 없고 그게 비단 D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너무 각박해진 탓일 수도, 관심이 오지랖으로 오해받는 것일 수도,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태도일 수도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편견이 있고 상처가 있을 때는 외면하고 싶고 마주하기가 두렵다. 그것이 본능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적능력이 있는 인간이지 않나. 본능을 이겨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에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과 만나고 싶다.

영혼이 그 풀밭에 누우면
세상은 더없이 충만해 말이 필요 없고
생각, 언어, 심지어 '서로'라는 단어조차
그저 무의미할 뿐.

—잘랄루딘 루미


    D는 D라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만으로 위로받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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