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 - 이야기 나눔
일찍 도착한 김해공항에서 비행기표를 끊어 놓고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한 잔 시켰다. 가져간 책, 틱낫한 스님의 『평화는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꺼내 들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는 말씀을 읽으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집을 떠나오기 전, 내가 일본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내가 혼자 간다는 사실을 부러워했다. 반면 나는 남편에게 애즈원 커뮤니티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해 아쉬웠고, 그래서 사람들의 부러움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나는 이 여행이 내게 쉼이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몇 시간 뒤에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지 않아도 되고, 저녁밥을 해야 한다는 걱정도 없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비행기만 기다리고 있는 그런 고요한 순간은 참 오랜만이었다.
일본까지 가서 애즈원 커뮤니티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갈등을 예방하는 장치인 미팅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고, 하나는 커뮤니티 센터나 조이(돈을 사용하지 않는 생필품 보관소), 다이닝 제로(식당), 숙소(주거지) 등의 시설들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도착해서 시설들을 하나씩 둘러보는데, 가슴이 뛰었다. 사진으로만, 글로만 봤던 곳인데 그런 곳이 있다,라고 하는 것과 실제로 내 눈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정말로 이게 가능하구나 실감했고, 그럼 우리도 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나는 어느새 마음이 경주 늘숲마을에 가 있었다. 근처에 공간을 하나 마련할까, 월세는 어떻게 감당할까 그런 간질간질한 상상들을 하느라 바빠졌다.
이틀짜리 투어를 통해 커뮤니티가 어떤 곳인지 모두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또 하냐’고 할 정도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은 건 분명했다 (밥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이야기를 나누는데 전념할 수 있었단 걸 생각하면 감사한 일, 늘숲마을도 애즈원처럼 한 사람이 100인분의 밥을 해서 나눠먹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그 많은 대화 시간 덕분에 외부인의 한계를 넘어 공동체의 안에 흐르고 있는 공기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애즈원 네트워크는 크게 5가지, ‘사람의 본성을 아는’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물자는 있는 곳에서 필요한 곳으로 흐르고’ ‘아이들과 함께’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일을 하는’ 사회를 실험해가고 있었다.
이 5가지 생각들도 결국 하나의 생각으로 모아졌다.
“당신과 나 사이의 벽이 없어져 하나가 되는 사회”
“The World will be AS ONE”
— 존 레논, <Imagine>
벽이 없어진다면 ‘당신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당신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될 것이다.
지금의 사회는 거꾸로,
‘당신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고 당신의 불행이 나의 행복’은 아닐까.
여담인데, 일본은 바닥 난방을 하지 않아 서늘하다. 일본에 있다는 사실에 하루 종일 마음이 둥둥 떠있다가도 밤만 되면 따끈따끈한 온돌이 있는 한국이 그리워졌다. 투어 중 머무는 숙소에 ‘린나이’ 가스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자 한 참가자가 반가운 듯 “한국 린나이가 여기도 있네.” 외쳤다. 사실 린나이는 일본 회사다. 그런데 왠지 한국 회사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인데 정말….
저녁을 먹고 10명의 사람들이 한 방에 둘러앉았다. 따뜻한 차를 한 잔씩 손에 들고 등받이가 있는 좌식 의자에 기대었다. 작은 사이즈의 화이트보드를 하나씩 받아 들었다.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미팅의 주제는..
<“그러면 안 되지”라고 사람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들고 있는 화이트보드에 적고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나는 남편을 떠올렸다.
“공부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남편에게 잊을만하면 하는 말이다.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것처럼 남편도 그렇게 하길 바랐다. 남편이 책 대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말은 못 하고 속으로 못마땅해했다. 공부해야지, 말하면 남편은 잔뜩 기가 죽어서 “해야지. 해야 되는 거 아는데, 잘 안 되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곤 했다.
미팅의 진행자가 물어왔다.
“왜 그러면 안 되지,라고 말했을까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진행자가 되물었다.
“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걸까요?”
“나의 생각과 판단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나요?”
“어떤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했을까요?”
질문을 하나씩 따라갔다. 그러게, 나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책에서 성현들이 그렇게 살라고 했고 살아보니 좋아서 그랬는데…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정말 어떤 마음으로 말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도 행복해지길 바란 거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서 멈췄다. 그가 행복하길 바래서 그런 거야. 훈훈한 결말이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좀 더 가봐, 거기가 끝이 아니야, 외면하지 마, 내 안에서 목소리가 속삭였다. 나는 다시 한번 내게 물었다. ‘정말 그럴까?’
나는 남편에게 공부하라고 말할 때마다 그가 슬퍼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를 위해 해야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 착한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에 나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의 미래를 위해 공부하라고 말하는 부모처럼 나는 남편에게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조금 더 내디딘 생각의 끝에는 나의 욕망이 있었다. 나는 남편이 내가 힘든 길을 갈 때 옆에서 나를 지지해주고 지원해주고 답을 찾아주는 조력자가 되어주길 바랐다. 나를 이해하고 내가 가는 길을 함께 가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면 안 되지’라고 그를 부정했을 때 보이지 않지만 남편의 마음속에는 벽이 생겼을 것이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대화가 아니라 나의 잔소리였을 뿐이었네, 생각하니 남편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많이 미안해졌다.
진행자는 미팅의 맛만 본거라고 얘기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다. 나는 나를 탐구하여, ‘남편이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알아차렸다. 몇 년 동안 풀리지 않은 채로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문제였는데, 여기서 이렇게 해답을 찾을 줄은 몰랐다. 이제 더 이상 이 문제로 남편을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니 후련해졌다.
재밌는 것은 진행자는 진행만 했을 뿐이다. 어떤 이론이나 생각을 내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질문만 했을 뿐인데, 나는 스스로 답을 찾아내었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걸까. 애즈원에서는 이것을 ‘사이엔즈(SCIENZ: Scientific Investigation of Essential Nature + Zero)라고 불렀다. 커뮤니티에는 사이엔즈를 공부하는 코스가 마련되어 있었고 책도 나와 있었다. 나는 일본어는 아리가또 밖에 못하지만 번역기를 믿고 두 권을 구입했다.
미팅의 여운은 다음날 아침 산책길까지 이어졌다. 전날 나눈 이야기를 곱씹으며 근처 공원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코너를 돌자 눈앞에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 거기 묘목이 있었다. 내 가슴께에나 올려오려나. 나는 멈추어 그것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문득 지금의 나는 묘목일까 생각했다. 되어야 하는 건 고목인데, 아직 묘목일 뿐인 걸까. 애즈원처럼, 우리도 식당이 있고, 일터가 있고, 숙소도 있으면 좋겠는데, 서두르면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아 요새 마음이 조급했다.
나는 걸으며 전날 배운 대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고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한 시간 동안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며 걷고 또 걸었다. 그날 공원에는 호수의 잉어들에게 밥을 주는 할아버지가 있었고, 조깅하는 사람들 틈에 아이들을 기다리는 놀이터가 있었고, 커다란 고목들이 붉게 단풍 들어가고 있었다.
산책이 끝나고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일본인 리키가 알려준 타마고 캐비지 산도(계란 양배추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며 가냘픈 묘목 같은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첫 번째 날 밤과 두 번째 날 아침, 나를 탐구한 경험들은 내게 큰 배움이 되었고 앞으로 늘숲이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 주었다.
지금 사회에서 부모가 홀로 해내야만 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지, 세어보면 숨이 막힌다. 아이들을 돌보고 돈을 벌고 밥을 하고 그러다 보면 나를 살필 시간은 포기하게 된다. 여행 첫날 공항 카페에서 느꼈던 이 여행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본다.
아이들을 남편인 영감과 친구 은선이 봐주었다. 여행을 떠났으니 돈을 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 여행이 단순히 여가가 아니라 공동체 탐방인 만큼 나는 경주에 있는 친구들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에 전념하고 누군가 만들어준 밥을 먹고 나를 돌아보는 미팅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고, 무리가 없었다. 이것은 일탈의 즐거움일까 아니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회의 모습일까.
일본에 도착한 날부터 참가자들의 하루 세끼 밥을 챙겨주었던 ‘일본 할머니(본인이 직접 쓴 표현)’ 키미코상에게 헤어지는 날 편지를 썼다. 맛있는 밥, 덕분에 잘 먹었다는 감사의 의미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그러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서 노트 한쪽을 찢어(진솔샘 감사해요) 번역된 일본어를 그림 그리듯 써서 전해 드렸다.
다음날 떠날 준비를 하는데, 키미코상이 보낸 답장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읽을 책 사이에 끼워놨다가 비행기에 타자마자 편지를 꺼내 읽었다. 일본어로 된 편지 한 장, 누군가 한국어로 번역해 준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람들 모두가 밝고 즐겁고 그 사람답게 인생을 보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키미코 상의 마음과 내 마음이 어느새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