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바 Jan 20. 2023

바다 밑에서 만난 아이

애즈원 세미나 후기

“꺼내어 함께 살펴보자.”


세미나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무엇을 ‘꺼내’야 하는지, 어떻게 ‘살펴보는’지, 낯설기만 했다. 내게 던져지는 질문에 정답이 있을 것 같고, 그 답을 맞혀야 할 것 같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결국 나는 답을 알지 못했다.

세미나를 한창 진행하던 중 나는 패닉에 빠졌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발은 허우적대고 고개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찾아 두리번 대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내가 원하는 ‘그곳’에 닿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곳이 어딘지도 몰랐다. 그런 막막함이 나를 지치게 했다.

다행인 것은 내가 그때 그런 나의 상태를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해 못 하고 있는 건 나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서 부끄럽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이해를 못 하고 있다고 용기 내서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곳이 그럴 수 있는 곳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진행자인 흥미가 말했다. ‘내 안에 있는 걸 꺼내보라’고.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어쨌든 내가 하던 행동 말고 다른 거겠지 했다. 그럼 저 멀리 말고 바로 지금 여기, 망망대해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 밑은 어두워서 잘 안 보이긴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니 꽤 말끔한 스케이트보드부터 이끼가 잔뜩 낀 고무 타이어까지 완전 별천지였다. 나는 궁금해져 하나씩 시간을 들여 살펴보았다.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이런 것들이 아래에 있었구나, 이끼를 닦아내고 자세히 보니 이런 모양이었구나, 하는 알아차림이 평소 새로운 것을 알아가기 좋아하는 내게 놀라움과 기쁨을 주었다.

호기심이 충족되는 즐거움이 어느 정도 계속되었을 무렵 나는 이 물건들에서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물건들은 서로 빈틈없이 단단하게 쌓이고 쌓여 하나의 커다란 벽을 만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만들어진 이 공간을 나는 그때야 처음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그 속에 갇혀있다는 사실도.

이 물건들은 어디서 왔을까?

누가 여기 내 옆에 갖다 놨을까?

이 벽 너머엔 뭐가 있을까?


벽은 꽤 단단했다. 두드려도, 발로 차도 꿈쩍하지 않았다. 움직이긴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려던 순간 벽 너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나는 경계하면서도 궁금해졌다. 누굴까?

“안녕!”

목소리를 들어보니 내 또래의 여자아이 같았다.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여기 있는 걸 움직이고 싶은 거야?”

“응. 이 커다란 타이어를 빼면 그쪽이 보일 것 같아. 나는 벽 너머를 보고 싶어.”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쪽에서 당길 테니까 네가 밀면 어떨까?” 아이가 말했다.

아이와 나는 힘을 합쳐 밀고 당겼다.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는 어떨까 이야기하며 어디서 사는지 뭘 좋아하는지 바다 밑에 있는 건 어떤지 잡담을 나누며 우리는 계속 밀고 당겼다. 어느 순간 물건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더 크게 흔들리고 이내 요동치더니 쿠르릉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무너져 내린 벽 반대편에 그 아이가 있었다. 주위가 여전히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오히려 어둠이 우리를 연결해 주고 있었다. 너와 나를 구분하는 그 무엇도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낯설지만 한껏 고양되는 기분이었다.


아이가 바다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저쪽 벽 너머에 누가 있는지 가보고 싶어.”

나는 그 아이를 이제 막 만났지만 왜인지 따라나서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아이는 뭘 하고 싶은 걸까,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어느새 나는 바다 위의 ‘그곳’을 잊은 채였다. 하루빨리 ‘그곳’을 찾아 나서고 싶었던 조급함은 사라져 버렸다.

이 아이를 알게 되고, 이야기 나누고, 함께 있는 것이 나는 좋았다.



세미나를 마치며, 사람이 가지고 있는 틀이란 꽤 단단하구나 감탄했다.

책을 읽어도 나의 틀에서 해석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도 나의 틀에 맞춰 이해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놀랍기도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제껏 나는 단단한 틀이 되어버린 벽 속에서 홀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울고 웃고 있었을까.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세계에서 혼자 할 수 있어, 외치며 있지도 않은 정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무너진 벽 너머에서 만난 아이와 사랑에 빠질 거면서. 그럴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러고 살아가고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봐주어야지.

"당신은 어떤 마음인가요?"라고.

그런 건 왜 물으시냐 되묻거든 이렇게 말해야지.

"당신과 친해지고 싶으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읽을 때마다 더 사랑하게 되는 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