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애인을 소개할게.
연말이 되자 그가 슬슬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내 표정이 굳기 때문에 그는 늘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데 이번엔 조금 더 단호했다. 내년에 결혼을 하려면 설 연휴에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는 12년 차 커플이고 4-5년 차에 1년 정도 헤어졌었다. 헤어지기 전에는 가끔 서로의 부모님을 만나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었지만, 다시 만난 후로는 어느 쪽에도 말씀드리지 않았다. 공인도 아닌데 비밀 연애를 한 셈이다. (만, 나의 엄마와 이모들, 할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께 결혼 이야기를 꺼내려면 내가 그를 다시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고민에 빠졌다. 설 연휴에 우리 가족이 할머니를 모시고 2박 3일 여행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행 중에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면 내내 질문 공세에 시달릴 것 같았다. (언제 다시 만났니? 요즘 어떻게 지내니? 등등) 게다가 애인은 이전과 다르게 직장인이 아니라 요리를 업으로 삼고 있었고, 늘 '안정적인 직장(=공무원)'을 강조하는 아빠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다.
언제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여행은 끝났고, 엄빠(엄마와 아빠), 할머니, 나, 네 명이 한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무슨 메뉴를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릇을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다다음 주 토요일에 식사할 때 남자 친구 소개해줄게."
모두가 멈칫하며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앞자리의 엄마와 할머니는 '드디어 데려오는구나.' 하셨을 것이다.
보통은 '뭐 하는 사람이니?'라고 물을 것 같은데, 나의 아빠는 "이름이 뭐야?" 하셨고 나는 웃음이 터졌다. 뭐지? 이름을 말하면 그 사람에 대해 뭘 알 수 있는 거지? 내가 손흥민 선수를 데려올 것도 아닌데.
"OOO" 그의 이름을 말했더니 아빠는 다시 만나고 있었냐며 놀라셨다. 요리를 한 지 5년 정도 되었고, 지금은 OO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고, 올해 자신의 가게를 오픈하려고 한다 등등 그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아주 오래간만에 묵직한 긴장감과 압박을 느꼈는데 엄마와 아빠가 거의 동시에 "우리 큰딸의 선택을 믿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코와 눈이 뜨끈해졌다.
식사 자리를 위해 룸식당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니 집으로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무사히 끝난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10여 년이나 만났고 아빠 엄마가 헤어지라고 해서 헤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 그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 된다고. 그 생각 때문에 새벽에 잠이 안 와 거실에 나와봤더니 엄마도 잠을 못 주무시고 계셨다고.
사실 회사를 다니던 시절의 그는 자주 이직을 했기 때문에 그때도 나의 부모님은 걱정을 하셨었다. 아빠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달리 할 말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이번엔 머리가 뜨끈해졌다.
아빠도 이미 알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에게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헤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엄빠가 잠을 못 주무실 정도로 걱정하시는 것이 죄송하면서도 화가 났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