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Next step
1. 조금씩
나와 1년 반을 함께한 내 전우, 우리의 첫 번째 점장님이 11월을 마지막으로 퇴사했다.
사람을 구하지 못해 둘이 버텼던 시간들을 떠올리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미슐랭에서 연락을 받고 내가 가장 먼저 연락한 것도 이 친구였고, 그 기쁨을 함께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 역시 이 친구라서 가능했다.
안암도 이제 3년 가까운 시간을 생존해 낸 음식점으로, 돌이켜보면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고, 그 과정을 나눌 함께 곱씹을 유일한 친구였다. 이제 이 친구는 떠났지만, 나는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늘어난 직원들과 그들을 책임질 사장으로서 가야 할 길이 첩첩산중이다.
둘이 이겨낸 시간을 이젠 내가 좀 더 앞서 이겨내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을 신뢰하면서 나가야 할 길이 있다.
미슐랭과 점장님의 퇴사, 그리고 책임감 있는 직원들의 입사를 계기로 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분명, 우리는 나아지고 있다는 게 점장님과 내가 동의한 부분이다.
2. 근로계약서
우리의 인사관리 과정은 형편없었다.
사람을 못 뽑아서였을까, 그래서 사람을 못 뽑았던 걸까. 계란일까, 닭일까. 뭐가 먼저인 걸까.
핑계를 대자면, 사실 음식점에서 근무하면서 그런 시스템을 경험한다는 건 참 어렵다.
대게 구글에 떠돌아다니는 표준 근로계약서에 헐겁게 구색을 갖춘, 그 왜, 우린 이거 썼어. 하고 벌금을 피하기 위한 구색 그런 거. 외식업이란 직군은 사용할 수 있는 외부자산이 전무하고, 자원 역시 희박하여 그런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게 사실이다. 나 역시 플레이어로 하루 일을 쳐내기 바빴을 땐 신경 쓰지 못한 게 사실이고, 들고오고자 경험해 본 무엇인가가 없다.
헌데 이젠 좀 신경 쓰려고 이래저래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이유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아마추어인게 어쩔 수 없는 것은 작아도 괜찮을 때다.
하지만 작아도 괜찮거나, 아마추어틱한게 괜찮은 시간은 여유 있게 주어지진 않는다.
점점 많은 사람이 납득하는 시스템을 안착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모든 시스템을 대기업처럼 갖출 순 없다. 언젠가 그 몸집에 맞는 시스템이 필요한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직은 멀었지만 그렇대도 지금의 직원이 큰 집단이 된 우리 미래의 직원보다 소중하지 않거나,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대도 결국 내 능력의 문제이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는 실리적인 사장님들이 계신다.
구색을 갖추기 바쁜 모습에, 언젠가 내가 망하면 그런 것 때문에 망하는 거라고 손가락질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 음식점 운영해서 얼마나 남는다고, 알맞은 노무사를 찾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법의 선 한참이나 안쪽으로 들어오도록 연봉테이블이나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일에 시간과 돈을 허비한다는 건 어쩌면 그분들의 말이 증명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직 그런 거 할 때 아닌데, 헛바람 들었네 할지도 모르지. 직원들 연차를 어떻게 챙기고, 직원들 급여를 그렇게 줘도 되는 게 맞는 건지 묻고, 그런 데서 아끼는 거라며 나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하겠지.
여전히 나는 매출과 지출을 볼 때마다 손이 벌벌 떨리고, 노동력을 아껴 자신의 벌이로 치환하는 사장님들이 부럽고, 영리해 보인다. 생존은 자영업의 필수조건이라, 그 영민함과 뻔뻔할 수 있는 기술이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음식점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분명 나의 이런 선택보다 오래 살아남을 거다. 근로기준법을 가장 얕은 선에서 지키는 게 사장의 이익과 연관이 되니, 참으로 얄궂기 그지없다.
우리는 그런 긴박함을 잔뜩 안고 살아남아야 하는 현장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근데 나는 그렇게 생겨먹질 못했다. 이런 일들을 "손해"본다 생각하는 리더를 생각할 때엔, (물론 그럴만한 일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 도망들도 많이 가고. 십분 이해야 한다. ) 나의 60대, 70대를 상상하게 되는 사람이다.
그때의 내가 돌이켜 봤을 때도 지금 이 행동이 큰 손해처럼 느껴질까? 내 직원들이 대우받는 회사가 되기 위한 한 발이, 차곡차곡 쌓여서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 그 나이의 내가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는 곳에 더 가깝지 않을까. 여기서 이렇게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큰 집단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런 자잘하다 느낄 지출들이, 분명 안암이라는 음식점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인건비라는 고정비를 줄여야 우리의 생존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연장근로수당이네, 기타 주휴 수당을 챙겨주는 게 맞냐고? 그들의 삶을 책임지는 어른이 되기 위한 위험 높은 선택들이 아이러니하지만, 내가 살아남는 선택이라고 느낀다. 나의 젊은 시절이 나의 노후에게 부끄러운 시절이여선 안된다.
내가 잘 안 되더라도, 어떤 선택들이 부끄러운 채로 잘 안되선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해야 하지, 그런 부끄러움들이 쌓인 채로 실패해선 안된다.
큰 그릇에 담아야 할 큰 사람들을 담기 위한, 큰 그릇이 될 준비를 해야한다. 설령 그게 실패한대도 말이다.
나는 좀 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직원일 때 받아보지 못했던 여러 장 짜리 근로계약서를 직원에게 제공하고, 나의 젊은 시절보다 더 많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리더이길 바라고, 그들의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어른이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람이고 싶지도 않다. 적당한 구색을 갖췄으니 되었다고 말하는 그런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지 않다.
세상이 변했다고들 한다. 물론 변했다. 분명 나는 올드스쿨이고, 트렌디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대도, 별거 아닌 근로계약서의 디테일함을 갖춤으로 우리 안암이 더 나아졌다고 느끼고, 또 나의 성장을 느낀다.(직원들은 그렇지 않겠다만.)
노무사와 내용을 정리하고, 봐도 잘 모르겠는 연봉테이블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프린트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근로계약서와 연봉계약서를 뽑아 정리를 하다 혼자 살짝 기쁨을 느꼈다. (직원들은 그렇지 않겠다만.)
회식카드를 만들기 위해 통장을 만들고, 카드를 만들어 그 회식카드에 금액을 채우는 조건을 정리해 올리면서 우리 가게가 조금 더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만이 알고 있는 나의 작은 시작은 이제 꽤 많은 사람들의 시간선과 경험의 집합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을 정리하는 게 여전히 아마추어인 내게 정신없는 일의 연속이지만,
내가 말로만 직원들에게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매출이 늘어날수록 이 친구들이 점점 회사 다니는 기분이 나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그런 작고 사소한 일들이 나와 이 친구들에게 더 프로다운 태도를 만들어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나보다 큰사람이 내 주머니에서 나오길 바란다.
나를 발판으로 한 누군가가 있기 위해, 내가 좋은 어른이고 싶은 마음 역시 간절하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보다 나은 시스템을 안착시키기 위해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건 나로 족하다.
나의 다음 세대는 내가 일궈둔 나의 경험보다 나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전까지, 내 주머니가 점점 커져서 더 많은 사람이 들어와도 답답해하지 않는 주머니가 되길.
끊임없이 바래본다. 나는 몇장짜리 근로계약서를 보고, 이제야 내 꿈에 한 발자국 다가선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