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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an 04. 2023

다 내 탓이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한파다.


날씨도.

경제도.

회사도.


사업팀이 결성된 지 5개월이 넘어가고 6개월이 되어가고 있다.

팀원들의 반년짜리 계약서의 효력도 만료시점이 다가온다.



대표의 질문


얼마 전 대표가 나에게 물어왔다.


'현재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의 팀원 중에서
만약 한 명만 남긴다면 누구를 남길 것인가?'


단순히 누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묻는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어설프게도 그 의도를 헤아리고는 답변을 했다.


"현재 팀원들 모두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으며, 대체 불가능한 인력입니다."


그러나 매몰차게 돌아온 대답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대답하면 안 된다.'

였다.


대표 본인의 경우 회사를 처음부터 이끌어오면서

본인부터 시작해서 한 명씩 점차 사업을 키워나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찬가지로 한 사업부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언제든지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을 갖고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현재 사업부는 이미 회사라는 뒷배를 갖고

여러 금전적인 지원과 장비에 대한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이미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언제든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사업 운영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과 대비를 해야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결국 이 질문은 한파를 맞이한 지금

어떻게든 챙겨야 할 입 개수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물어온 것이었다.



될 놈 안 될?


어렵게 어렵게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찾고

그들을 설득해서 팀원으로 합류시키고

정부지원 사업도 수주를 받아서 나와 그들의 인건비를 커버하고

사업에 필요한 기반을 지난 몇 개월동안 쎄빠지게 마련한 상황에서

하필 경쟁사들을 제치고 맹렬하게 치고 나가야 하는 이 판국에 말인가?


작년 동안 계속 견지했던 운영 방향과 크게 달라지는 것이었다.

비용도 최대한 줄이고

또 지출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 프로젝트의 진행시기를 최대한 미루고

게다가 인력마저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필수적인 인력까지 모두 다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될 일도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엄습했다.


될 놈도 안 되게 만드는 자충수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깊은 심려로 며칠간 밤낮으로 시름했다.



헤어질 결심


며칠에 걸쳐서 대표와 경영진들과 많은 상의를 했으나

결국 다섯 명 중에서 세 명은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두 명만 계약 연장을 하기로 했다.


최대한 내 딴에서는 팀원들의 필요성을 최대한 피력했으나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대표라서 그런지

이와 관련해서는 한 치 양보도 없었다.


결국 세 명을 정리해야 하고 이들에게 이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평소보다 특히 요 며칠간은 많이 지치고 피로감이 빠르게 싸여갔다.



다 내 탓이오


이러한 결정을 내린 대표가 원망스러웠고

위기감과 절박함이 없어 보이는 팀원들이 한심해 보였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렇게 번민에 휩싸인 채로

계약이 더 일찍 종료되는 한 명에게 먼저 통보를 했고

현재 두 명에게 추가로 전달해야 하는 상황을 앞두고 있다.


이런 불만족스럽고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앞두고서

부쩍 화가 많이 늘었다.


일에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화가 났고

이게 겉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엉뚱한 소리를 하는 팀원을 다그치고 추궁하기도 했고

일을 맡긴 협력사의 업무 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계속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터지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상황을 좀 차분하게 관조하면서

스스로에게 이 상황에 대해서 처음으로 묻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면?
좋든 싫든 이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사업이 잘 되기를, 팀원들이 잘 되기를, 우리 모두 성공하기를 바라는 좋은 의도로부터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선택되어 온 것이지만
결국 그것이 사업 실패, 팀원들의 불행, 모두의 실패로 이어진다면?
내가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이 지금과 같은 결과를 야기한 것이라면?


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니 결국 지난 고민의 시간 동안

스스로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자위하고

어찌 되었던 그 행동들이 현재의 결과를 도출해냈다는 것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 생각에 미치니

더 이상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실제가 아닌 허상에 더 이상 내 정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담담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이 모든 게 결국 내 탓이오.


잘했든 못했든 현재 상황을 야기한 것은

어찌 되었든 내 책임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다시 현재 상황에 집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지금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생산적인 방향으로 사고전환을 할 수 있었다.



지옥도를 벗어나는 방법


지금 하는 생산적인 것으로 보이는 생각이

어쩌면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어설픈 선의'는 걷어내고

한파를 이겨낼 정도의 냉철한 판단력을 갖추고

냉철한 실행력으로써 지옥길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길을

조금이나마 일찍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통이 계속되는 것 같은

암울한 것 같은 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설픈 판단에서 벗어나서

나를 바로 보고, 현 상황을 인정하고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따지고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지금 내 상황으로 돌아오자면

어설프게 직원들을 동정하거나 나 자신의 자기 연민에 빠질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직원들의 계약을 그대로 해지하느냐 연장하느냐의 관점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업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남아있는 팀원, 그만두는 팀원들이 각자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래서 모두가 성공할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추고

그에 대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상황과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 결국 나였기에

이것을 바꿀 수 있는 것 역시 결국 나이다.


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결국 나에게 한 떨기 위안과 희망이 될 줄이야.


나 자신에게 조금 더 냉철해지면서

오히려 나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더불어 이번에 몰려온 한파를 어떻게 이겨낼지도

추위에 대한 걱정 대신 가슴속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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