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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을 시기별로 구분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해주세요

by 가온왕

[한달: 자기발견] Day03. 인생 시기별 객관 분석

아직 미완성 글입니다.



1. 탄생 및 유년기 (1-2번. 1988-1991년. 만족도: 8)


당시 실제로 경험했던 것들과 꿈에서 듣고 보았던 것들이 비슷한 수준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시기이다.
어렴풋한 장면들 중에서 당시의 의도와 감정이 제법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들도 있는데, 이게 과연 당시의 순수한 기억인지 아니면 세상을 더 살면서 덧칠한 기억과 감정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당시는 내 기억보다는 부모님과 친척들 등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 요 며칠간 정보 수집이 부족했지만, 시간이 날 때 이따금 다시 들여다보고 아직 세상 때가 덜 묻은 나의 모습이 어땠는지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2. 미국 생활 (3-20번. 1992-1996년. 만족도: 9)


미국 유학을 가신 부모님 덕을 제대로 봤던 시기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게 좋은 줄도 모르고 마냥 즐겁고 행복했던 시기이다. 물과 공기도 깨끗하고, 당시 살았던 도시가 적당한 크기이기도 하고 이웃들도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렸을 때라서 딱히 공부한다는 개념 없이 영어나 컴퓨터, 체스나 그림 그리기 등을 흡수하듯이 받아들였다.
나의 특이한 취향들도 드러나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드러나는 시기이다.
동네 밖에는 선인장과 모래, 자갈 등이 펼쳐진 황무지 구간이 펼쳐져있었고, 바닥을 보면서 돌멩이 구경만 해도 재미있었다.
다양한 뿌리를 가진 사람들과의 경험, 어렸을 때부터 발표를 시키는 미국 교육과정 덕분에 나중에 커서도 소통과 나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적었다.


3. 다시 한국 (21-29번. 1996-2000년. 만족도: 8)


미국과 비교해서 한국은 하늘도 뿌옇고 텔레비전 채널도 몇 개 없어서 답답했다. 미국에 대한 그리움이 계속 남아있었던 시기이다.
그 당시 미국물 먹은 놈이 신기해서인지, 한 학년을 월반한 어린놈이 신기해서인지 주목을 많이 받았다. 여자아이들에게도 관심을 받았었는데, 아무것도 모를 때라서 불편하고 어색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만큼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거의 없었고, 공부도 제법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당시 가장 큰 추억은 친구들과 동네 뒷산 철조망을 넘어가서 탐험을 하고 전쟁놀이 등을 즐겼던 기억이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가 초등학교 5학년경에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또래 아이들이 거의 다 축구와 농구를 좋아하던 것에 비해서 나는 그림, 만화 등을 그리고 공상하는 것을 즐겼다.


4. 남자들의 세계 (30-35번. 2000-2003년. 만족도: 6)


질풍노도의 시기의 시작이었다. 부모님과 갈등이 꽤 잦아졌다.
학교에서는 짱에게 맞아 쌍코피가 터지고 얼굴에 금이 가는 물리적인 타격도 있었다.
남자 또래 사이에서 왕따를 시키고, 괴롭히고, 질투하고, 때리는 등의 모습들을 보고 겪어오면서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지, 옳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고 법조인을 목표로 삼게 된다.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한 덕분에 나름 무탈한 생활을 보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도 급과 위계가 나뉘는 것을 보고 부조리함을 느꼈다.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부모님도 그렇고, 학교 선생님들도 인격적으로 완벽하지 않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5. 도전의 시기 (36-42번. 2003-2006년. 만족도 4)


시험을 보고 특목고에 입학했다.
이때까지 살면서 공부 스트레스 딱히 없이 살았다면, 이때부터는 공부가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다.
나름 한 공부 수준 한다는 애들이 모인 학교라서 그런지, 다들 똑똑하고 성적도 잘 나왔다.
중학교랑 비슷하게 생각하고 고등학교를 맞이했던 까닭일까? 성적이 좋지 않게 나왔다. 이 당시 다른 것들보다 수학과 과학에 흥미가 있어서 그나마 재미로 공부했고, 암기과목인 인문계 위주의 과목 성적은 눈에 띄게 안 좋게 나오는 과목들도 있었다.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와 또래집단에서 인정을 못 받는다는 생각, 그리고 자격지심에 학교 내부 상담사를 여러 번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생활 중에 공부 외 즐거움이 있었다면 신입생 OT 때 첫눈에 반한 힙합댄스 동아리 활동이었다. 춤이라고는 춰보지도 않았지만, 어떻게든 붙어야겠다는 생각에 오디션도 보고 끝나고 선배들 뒤를 따라가서 브레이킹 댄스 동작을 해보겠다고 시도하다가 넘어진 끝에 얻어낸 값진 결과였다.
이때는 성적도 떨어지고 위축되서인지 남들 앞에 나서는 게 어려웠는데, 동아리 활동과 친한 친구들과의 교류 덕분에 다시 활발함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많이 어두워서 극단적인 생각도 많이 했던 시기이지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경험들을 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시기이다.
몇천명이 보고 있는 무대에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뛰쳐나간 적도 있고, 나 자신이 고백을 하거나 친구의 고백을 도울 때 과감하게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6. 유학 준비 (43-48번. 2006-2007년. 만족도 6)


나름 인서울 대학에 합격했지만 목표 중 하나로 삼던 대학은 아니었다.
나도, 부모님도 과감했다. 다른 옵션인 중국 유학을 바로 준비했다.
그 사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할머니가 별세하셨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 때문에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영향이 컸고,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당시 또래들과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취하기도 자주 취했다. 유학 준비 이외에도 청년 프로그램 등을 참여해서 다양한 사회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본격적으로 배우고 시었던 무술을 매우 가깝게 접하게 되는 시기였다. 이전에 조금씩 배웠던 태권도나 검도와 다르게 실전 무술이 무엇인지 칼리 아르니스를 배우면서 크게 체험했다.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했고, 선진문물과 낡은 생활방식이 공존하는 혼란스럽고 역동적인 에너지에 반해서 중국 유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을 학수고대하게 된다.
남녀 사이의 감정에 대해서 깊게 경험하는 인연을 만났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꽤 큰 감정적인 상처로 가져가게 된다.


7. 중국 유학 (49-57번. 2007-2009년. 만족도 5)


일 년 반의 유학 준비기간 끝에 시험성적과 면접 종합 결과가 발표됐다.

천운이 따른 것인지 내가 원하는 학교와 전공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 당시 나는 중국 대륙을 앞으로 책임질 젊은 영웅, 젊은 경영자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있었다.
타지 생활을 하면서 힘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새로운 곳에서 친구를 사귄다는 기쁨에 취해있었다. 나중에 활동도 제대로 못했지만 동아리 가입 권유에 십여 개 동아리에 가입하기도 하는 등 이리저리 쑤시고 다녔다.
그렇게 고조되었던 감정은 수업이 진행되고 중간고사가 다가오는 동안 차분해지다 못해 바닥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돌변해있었다.
수업은 중국어 강의에 처음 배우는 내용들이었고, 고등학교 때보다 더 내로라하는 수준의 학생들이었으니 공부가 뒷전이었던 내 성적이 내 기분과 함께 바닥을 치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중국에서 뼈를 묻고 말리라’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성적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2년간 방황하며 버티다 못해 나는 부모님과 상의해서 군대를 가서 재정비를 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 당시 방황을 하던 기간 중 철학, 종교, 정신세계와 과학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책에 나와있는 내용들을 실제로 따라 해 보면서 웃지 못할 황당한 경험들도 많았다.
대외적으로는 많이 활동한 덕분에 사람들도 많이 사귀고 학교에서 가장 큰 가수 선발대회 결승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아직 미완성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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