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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Oct 03. 2019

내향적인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

'아니에요', '몰라요'만 말하던 나는, 글 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당당.


 내향적인 면이 강했던 어린 내가 자주 했던 말은, '아니에요', '몰라요'였다.


 누군가 '너, 참 착하다.'라고 칭찬하면, 나는 대답했다. '아니에요.'
 누군가 '넌 글짓기 잘해서 좋겠다.'라고 칭찬하면, 나는 대답했다. '아니에요.'
 누군가 '넌 꿈이 뭐니?'라고 물어보면, 나는 대답했다. '몰라요.'
 누군가 '너, 지금 뭘 갖고 싶니?'라고 물어보면 나는 대답했다. '몰라요.'


 어쩌면, 나는 똑똑한 아이였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에요.', '몰라요.'라고 대답하면 질문을 한 어른들은 더 이상 어떤 질문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극도의 똑똑함으로 무장한 어린 나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라고 말이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고, 그 말에 대답을 하는 과정이 무척 힘든 아이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발표수업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잠재우느라 고생을 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어린 친구들은 나의 내향적인 면을 알아채지 못했다. 정말 잘 숨겼기 때문이다. 떨려도 안 떨리는 척, 말하기 싫어도 아닌 척, 화가 나도 안 난 척 나는 '감추기 대장'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부끄러움이 많은 어린이의 자존심이었을 수도.


 웹진 기자로 일하던 시절, 부장님 방에 불려 가 제안을 받았다.


 "글로리 씨,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사장님 이름으로 책을 하나 낼 건데 초등학교 아이들이 볼만한 구성이었으면 좋겠어. 원본은 있어. 그런데 그 원본을 초등학생들이 재미있게 읽을만한 내용으로 바꾸는 거지. 할 수 있겠어?"


 스물여섯의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부장님은 당황하셨다. 그러다 다시 한번, 힘주어 말씀하셨다.


 "글로리 씨,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부장님의 표정이 매우 날카롭고 결연하여, 나도 모르게 그만 답해버렸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원본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와 원본을 본 나는 앞이 막막했다. 진심으로 자신 없었다. 얼마나 고민되고 긴장했는지, 그 원본을 손에 들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끝까지 못한다고 하면, 이 회사에서 나를 뽑은 보람이 없을 것 같고 하겠다고 해놓고 분탕질을 해놓으면 그 또한 능력을 의심받을 것 같았다. 여린 마음에 '사표를 써야 하나?' 하는 고민도 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3일이 지나고, 전화기가 울렸다. 부장님이었다.


 "글로리 씨, 아직도 생각 중이야? 생각하지 마. 다른 사람이 하기로 했어."


 휴,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마음속에 불꽃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뜨끔뜨끔했다. 그리고 마구마구 죄책감이라는 녀석이 소리쳤다. '한 번 해본다고 하지 그랬어? 왜 무조건 못한다고 하니? 바보 같기는..'


 퇴근 후, 자취방에서 컵라면과 초콜릿을 폭식하며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일부러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위로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마저도 지쳐버리면, 노트북을 켜고 쓰기 시작했다. 그 날은 일기를 썼던 것 같다. 나를 위로하는 일기. 하얀 공간에 내 이야기를 쓰다 보면 어떤 때는 3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아간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글쓰기로 마음의 위로를 얻고, 상처가 치유되었던 것 같다.


 '아니에요', '몰라요'를 입에 달고 살던 내가 웹진 기자가 된 것은, 순전히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웹진 기자라 회사 홍보용 글과 인터뷰를 담아야 했다. 그래서 처음 보는 분과 두 시간 넘게 대화를 해야 하고, 억지스럽지만 회사의 장점을 어필하는 홍보글을 만들었다. '아니에요', '몰라요'를 입 밖으로 꺼내면 절대 안 되는 위치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처음 계획한 대로 올곧게 가는 법이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불나방처럼 글 쓰는 일을 찾아 헤맸던 이유 중 하나가 '사람들과 덜 부딪히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사람들과 많이 부딪혀야 하는 웹진 기자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미 백수로 지내며 '생활고의 악몽'을 겪은 터라, 나는 꾹 참고 이겨내야 했다. 어떤 회사를 들어가든 한 달만에 뛰쳐나오는 나를 위태롭게 지켜보던 엄마는,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거기서는 꼭 2년만 버텨라."


 엄마 말대로 나는 정말 2년을 버텼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퇴사했다. 아니 계약 만료되었다.

 2년 동안 나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명랑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회사는 2년 계약 만료의 이유로 나와는 마지막 인사를 원했다. 


뜨끔했다. 실은 나도, 엄마 원대로 꼭 2년만 버티고 그만두려 했기에. 

아쉬웠다. 그들이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멋지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지 못했음이.


훗날, 나는 '김선희로 살아가는 일'이라는 단편 드라마를 썼다. 주인공 김선희가 계약 만료되고 멋지게 성공하는 모습을 그렸다. 물론 드라마 공모전에도 냈다. 비록 본선도 못 갔지만 드라마를 다 쓰고 속이 후련했더랬다. 마음속에 남았던 '퇴사에 대한 아쉬움'을 글을 쓰며 치유한 것이다.


 '아니에요', '몰라요'만 말하던 어린 나는, 글 속에서만큼은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는 멋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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