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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Oct 03. 2019

어떤 의미에선 꿈을 이룬 여자

그러나 아직도 불안한 이유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과의 모임이 끝나고, 나보다 두 살 어린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게 되었다. 웃는 모습이 너무나 밝고 예쁜 그 친구와 나는 최근, 취업이 되어 더 이상 모임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비 오는 날, 차 안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 친구가 영문학 전공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전공을 살려 아이들을 가르쳐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영문학 전공 후 대학원까지 마친 인재였다. 이제 막 4살이 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데,  육아를 부탁할만한 사람이 없어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나 역시, 5살 늦둥이가 있어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그 친구 아파트 앞에 도착해서도 한참 대화를 했다. 결론은 '다음에 시간 될 때 더 이야기하자'였다. 우리 둘 다, 아이 유치원 하원을 하러 가야 했던 것.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마음 한 구석이 애잔해져 왔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그 친구를 보며, 젊은 나이에 결혼과 출산, 육아로 날개를 접을 수밖에 없는 '여성의 현실'이 쓸쓸하게 다가온 것이다.


 사실, 나는 꿈을 이룬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집에서 일하는 엄마'가 되길 원했다. 그 꿈을 이루기에는 '글 쓰는 사람'이 매우 적합하게 다가와 작가를 꿈꾸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엄마는 농사를 짓느라 바빴지만, 사실 수익은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자급자족이었다. 고등학교 때, 학원 하나 다니지 못하는 현실이 퍽퍽하게 다가왔다. 아빠는 여전히 일을 해서 돈을 버셨지만, 우리 집은 늘 쪼달렸다. 엄마에게 시선이 갔다. 엄마가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돈을 벌면 나도 영어와 수학 학원 정도는 다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엄마는 취업에 관해서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시골에서 월급 받는 직장이라야 공장뿐인데, 마흔 중반의 여자를 받아줄 리도 없겠지만 엄마도 그럴 의지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수학 시간만 되면 진땀이 났다. 기초부터 바로잡지 못해, 고등학교 수학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실력이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학원이라도 다니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집 값을 달라는 나를 위해, 아침부터 돈을 꾸러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니 차마 '학원'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없었다.


 어쨌든, 당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엄마가 돈을 벌어왔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집에 없는 것도 싫었다. 엄마는 늘 집에 있는 존재였기에. 그래서 생각한 것이 '집에서 일하는 엄마'였다. 훗날,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집에서 일하는 엄마가 되어 돈도 벌고, 아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도 되어주리라 결심했던 것 같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1년 뒤부터 '교정교열'일을 시작했다. 주로 연구소 연구 성과집 교정이었고, 때때로 재테크 서적 에디터로도 활동했다. 물론, 일이 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프리랜서 그것도 재택근무를 원하는 나였기에 일도 많지 않았다. 그동안 했던 일들이 주로 글 쓰는 일들이었기에, 지원하면 연락은 꽤 왔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원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었다.


 어쨌든, 나는 꿈을 이루었다. '집에서 일하는 엄마'라는 꿈을.


 누군가 그랬다. 꿈은 구체적으로 꾸어야 한다고. 나는 그때, 조금 더 구체적으로 꿈을 설정했어야 했다. '집에서 일하며 아이들도 돌보는 돈 잘 버는 엄마'로 말이다. '돈 잘 버는'을 붙이지 않아, 나는 늘 배고픈 사람처럼 일을 찾는다. 신기하게도 서른아홉이 되니, 일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 상황에 대해 원인을 예측하자면, 책임자 즉 중간관리자들이 내 나이이거나 나보다 적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해한다. 책임자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할 때, '나이'따지는 우리나라에서 불편한 부분이라는 것을. 실은 나도 그랬다.


 사보기자로 일하던 시절, 간단한 '카툰'에 회사 이미지를 담는 연재 코너가 있었다. 카툰 분야로는 전혀 아는 사람이 없어, 무조건 인터넷 검색을 했고 몇 명을 찾아냈다. 그래서 어렵게 연락처를 알아내 통화를 하고 이력서 및 포트폴리오를 받았다. 당시,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한 분은 스물여섯 여성 분이었고 다양한 공모전에서 수상을 했으며, 그림 그리는 스타일도 시대의 흐름과 맞았다. 그런데 또 한 분은 마흔 다섯 여성분이었고, 사보 분야에서는 쟁쟁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트폴리오를 보니 그림도 꽤 좋으신 편이었다.


 스물일곱이었던 나는 '마흔다섯'이라는 숫자가 무척 올드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함께 일하기에는 세대차이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스물여섯 여성 분에게 전화했고 퇴사 전까지 함께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마흔다섯이었던 그 유능하신 선생님께 무척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 그분도 충분히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으셨을 텐데, 오로지 나이 하나로 선택받지 못하신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요즘, 나는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다. 두 달 뒤면, 마흔이 되기 때문이다. 서른아홉과 마흔은 엄청난 차이가 느껴진다. 벌써 마흔이라니, 솔직히 답답하다. 스물일곱의 내가 마흔다섯의 엄청난 실력자를 선택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흔의 훈장을 단 '글 쓰는 나'를 선택해줄 확률이 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는 말처럼, 오랫동안 교정교열 일을 하다 보니 그쪽 일만 잘하는 사람이 된 것이 사실이다. 힘들 때마다 일기, 동화, 에세이, 드라마를 쓰며 마음을 풀어냈지만 이제 와서 내 글을 쓰려니 '잘하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며, 나는 또 이 황망하고 불안한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휴, 그래도 다행이다.                                                                                            

정신과나 상담센터로 달려가지 않고, '글쓰기'를 할 줄 알아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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