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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나니 찰리 Mar 21. 2017

모에(萌え)가 모예요?

일본 서브컬처 키워드 모에 쉽게 읽기

모에에 가장 유사한 뉘앙스의 우리말은 아마도 '심쿵'일 것이다.

'모에'를 아는 당신, 평범하지 않다. 모에(萌え)란 '식물 따위가 싹트다'라는 뜻의 일본어 '萌える(모에루)'에서 온 서브컬처 용어다. 그러니까 이 단어의 뜻을 알고 있다는 말인 즉슨 당신이 유독 일본 서브컬처에 관심이 많거나 '오타쿠'란 얘기다. '모에' 혹은 '모에하다'의 용례는 다양하지만 대략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v. 대상에 강하게 끌리다/매력을 느끼다/열광하다 ② n. 특정 기호에 매력/쾌감을 느낌(≒페티시).


모에는 21세기 오타쿠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짚고 넘어가야 하는 개념이다. 지금은 '모에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100주년 웹사이트와 해당 사이트에서 공개한 로고. 베스트 애니메이션 100과 베스트 애니송 100 투표 이벤트가 진행중이다.

올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하 아니메) 100주년이다. 1917년 1월에 발표된 아시아 최초의 애니메이션 단편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芋川椋三玄關番之卷)'가 그 출발점이다. 같은 해 5월엔 '원숭이와 게의 전쟁(猿蟹合戦)' 6월엔 '헤코나이 하나와의 명검(塙凹内名刀之巻, 무딘 칼(なまくら刀)이라고도 함)' 등 잇따라 작품들이 나오면서 아니메의 원년이 됐다. 100주년 기념 웹사이트 '아니메100(anime100.jp)'에 따르면 총 1만1723개의 애니메이션 작품과 15만8442화의 에피소드가 쏟아져 나왔다. '애니메이션 왕국'이라 할 만하다. 1917년작 헤코나와 하나와의 명검 영상 링크 (1917년 만들어진 최초의 아니메 중 필름이 남아있는 건 '헤코나와 하나와의 명검' 뿐이다)


지난 100년 동안 아니메는 시대와 세대 아이콘으로서 일본인, 일본사회의 곁을 지켰다. 전후 피폐해진 세대를 위로했고(철완아톰), 투쟁의 동지였으며(내일의 죠), 성인들도 열광할 수 있는 문화이자(우주전함 야마토) '취미가 곧 주의(主義)'라는 선언과 함께 오타쿠 문화를 사회 현상으로 끌어올린 주역(기동전사 건담)이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이야기나눌 수 있는 장수 콘텐츠이자 유대의 고리이기(도라에몽)도 했다.


이후 몇 차례에 걸친 애니메이션 붐으로 주요 소비자는 보편적인 다수의 아동에서 경제력을 갖춘 오타쿠 팬덤으로 이동했고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DVD, 캐릭터 상품 등 미디어믹스가 주요 수익 모델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 사이에서 생산자(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생존과 성공을 위해 '팔릴 만한 요소'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모에는 아니메 산업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부상했다.


모에 코드가 자리매김한 이유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거대 서사가 상실되고 중심이 해체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를 연관성 없이 연속된 개별 사건들이 채우게 되는데, 아니메를 비롯한 서브컬처 텍스트 역시 서사의 빈자리를 캐릭터의 매력, 즉 모에 요소가 차지하게 됐다.


모에의 시대에는 캐릭터성과 이야기가 파편화돼 데이터베이스화되고 시청자들은 서사라는 뼈대 없이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조립한 캐릭터에 모에를 느끼는 것으로 작품을 소비한다. 창작자도 마찬가지다. 속성이니 요소니 하는 이름으로 정형화된 모에를 조합해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고, 캐릭터에 의해 작품을 전개시켜 나간다. 창작자와 소비자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클리셰이자 맞춤형 문화 상품인 셈이다.


캐릭터 소설이라고도 하는 라이트노벨이나 근래의 (모에가 강조된) 애니메이션은 이 같은 공식에 충실하다.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그만큼 대중적이며, 재미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모에는 거들 뿐 탁월한 이야기와 흡입력 있는 전개로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은 수작도 많다. 다만, (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감안해도) 당대 사회상이나 세대가 공유하는 정신을 담아낸 걸작들이 등장하기 어렵다는 한계는 분명하다.

게임개발자인 김용하 PD가 2014년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에서 강연한 모에론 발표자료 중 일부. 수많은 모에 요소들을 세로축 귀여움과 가로축 섹시함으로 도표화했다.

어려운 길로 돌아왔다. 쉽게 말해 모에는 '뿅가 죽네' 수준으로 열광하게 만드는 요소고, 요즘 아니메는 모에가 먹여 살리고 있다. 그렇다면 모에 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모든 것은 모에가 된다. 외모도 성격도 취향도 행동도 말투도 식성도 모두 모에 속성으로 설명 가능하다.


가장 유명한 속성은 '츤데레(ツンデレ)'다. 평소엔 호감을 숨기고 일부러 쌀쌀맞게 굴지만(츤츤) 이후 마음을 열거나 둘만 있거나 하는 상황에서 살갑게 구는(데레데레) 캐릭터를 일컫는다. 좋아하는 대상을 오히려 괴롭히는 아동의 행동 패턴과도 유사하다. 우리말로는 새침데기, 깍쟁이와 유사하다. 한국 문학 작품 중에도 츤데레 속성을 가진 캐릭터가 많은데 '동백꽃'의 점순이, '소나기'의 소녀, 그리고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도 츤데레다. (국내 비공인 설문에서 김첨지가 츤데레 1위가 된 적도 있다) 아니메 중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가 대표적인 츤데레 캐릭터다. 주요 대사는 "따, 딱히 널 위해 한 일은 아냐" 등이 있다. 츤데레의 강화형(?)으로 좋아하는 속내를 숨기려 욕설을 하는 욕데레가 있다. X발데레라고도 한다. 무한도전의 박명수가 대표적.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츤데레 캐릭터' 아스카. 힙합가수 데프콘이 꾸준히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쿨데레(クーデレ)도 있다. 평소엔 무뚝뚝하지만 가끔씩 본심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이 분야의 레전드는 에반게리온의 히로인 아야나미 레이다. 하얀 피부에 하늘색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의 레이는 감정이 없나 싶을 정도로 무표정하고, 말투는 차갑고 사무적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주인공과 관계를 통해 조금씩 자신의 속내를 보여준다. 레이의 신비한 매력은 그야말로 서브컬처계를 초토화시켰다. 이후 등장하는 쿨데레계 캐릭터는 좋든 싫든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늘색 머리카락은 쿨데레 공인 색상으로 남았다. 무뚝뚝한 캐릭터이다 보니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은 모조리 명장면행 급행열차를 탄다. 구 극장판 셀화 중 레이가 주인공 신지에게 희미하게 미소 짓는 장면이 경매에 나와 74만4000엔(약 74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신 극장판의 같은 장면은 낙찰가가 15만엔이었다.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쿨데레 캐릭터' 레이(왼쪽)과 레이에게 영향을 받은 캐릭터들. 유사한 외모와 성격, 즉 모에 속성을 공유하는 캐릭터들이다.

이외에도 천연(天然, 천진난만), 4차원, 열혈, 덜렁이(허당) 등 성격에 관련한 모에 속성은 무수히 많다. 츤데레와 쿨데레는 모두 갭 모에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의외의 모습, 그 둘 사이의 간극(gap)에서 발생하는 모에 요소이기 때문. 터프한 종목 운동선수인데 실은 매우 여성적인 취미를 갖고 있다든가 하는 것 따위도 갭 모에의 일종이다.


외모에 관한 모에 요소도 다양하다. 헤어스타일과 머리카락 색상 등은 앞서 설명한 레이의 사례처럼 머리카락 색상과 헤어스타일은 캐릭터의 성격을 암시해주기도 한다. 체형에 관련해 글래머 혹은 근육질, 슬림한 몸매 등에 대한 모에 요소도 있다.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안경 속성처럼 특정 액세서리에 관한 취향도 있다. 원래는 '지적인 캐릭터' '모범생' 등의 캐릭터를 부연해주는 장치에 가까웠지만 안경 자체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무려 '안경의 에로티시즘'이라는 책도 있다). 사람이 '고양이 귀'를 달고 있는 네코미미 속성도 있다.


연령에 대한 모에 요소도 있다. 서브컬처계 커뮤니티에서 가끔씩 벌어지곤 하는 '누님계(연상) vs 여동생계(연하)' 논쟁 같은 경우가 연령 모에 때문이다. 동갑내기도 속성 중 하나. 1990년대를 풍미했던 '오! 나의 여신님'에서는 히로인 베르단디를 비롯해 누님계, 여동생계 캐릭터가 모두 등장해 연령에 따른 캐릭터별 성향을 확립하는 데에 일조했다.


모에화(化), 모에선(線)이라는 표현도 있다. 모에와 거리가 먼 대상을 모에하게(=미소녀 의인화)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캐릭터는 물론 실존 인물부터 사물, 곤충(바퀴벌레도 있다), 맹수, 음식, 국가, 소프트웨어, 태풍(?) 등 상상을 초월하는 영역에서 모에화가 이뤄지고 있다. 보통은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생산되고 유통되지만, 모에 산업이 자리 잡은 일본의 경우 공식적으로 자사의 상품을 모에화해 홍보에 활용하는 기업이 많다.

모에화의 한 예. 애니메이션 '케모노프렌즈'에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로 무섭게 생긴 넓적부리황새 (왼쪽)을 모에화한 캐릭터(오른쪽)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모에 요소는 무궁무진하지만 다다익선은 아니다. 모에 요소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모에 키메라'는 오히려 모에를 저해한다. 어울리는 요소와 의외의 조합을 적절히 배합했을 때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하기 때문.


앞서 '동백꽃'의 점순이를 츤데레 캐릭터로 설명했듯이, 모에는 오랜 세월 다양한 콘텐츠에서 축적된 캐릭터성과 기호의 연장선이다. 다소 현학적으로 설명하기는 했지만, 포스트모던 시대 실종된 서사를 캐릭터가 채우는 현상은 비단 아니메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에 한국의 막장 아침 드라마만 봐도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들이 김치로 뺨을 때리고, "못난 놈"이니 "나다운 게 뭔데요?!"라며 싸우고 있지 않은가. 모에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모에와 서사, 상업성과 작품성의 균형점에서 아니메 100주년을 기념할 만한 작품이 나오길 빌어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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