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의 왕'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야기꾼으로 살아가게 만든 건 그의 아내 태비사 킹과 작가 리처드 매드슨(1926~2013)이다.
그가 거듭된 거절과 실패에 상심해 글쓰는 일을 포기할 때쯤 아내가 끝까지 믿어주고 격려해준 덕에 출세작 '캐리'를 완성한 일은 너무 유명하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다. 또 다른 조력자 리처드 매드슨은 1954년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의 공포소설을 펴냈다. 기존 흡혈귀물의 클리셰를 비튼 이 작품은 이후 후대 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참조되고 변용되며 수많은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 어떤 이들은 환상소설이 지닌 이야기의 힘에 이끌려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중 한명이 스티븐 킹이다. 스티븐 킹은 "작가로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로 리처드 매드슨을 꼽았다.
2006년 스티븐 킹은 휴대폰때문에 좀비 괴물이 되버린 인류를 그린 소설 '셀' 서문에서 리처드 매드슨과 '좀비의 대부' 조지 A 로메로에게 감사를 전했다. 모두가 괴물이 된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나는 전설이다'에 대한 훌륭한 오마주였다.
그리고 13년이 지나,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거장에게 자신의 신작을 바친다. "리처드 매드슨을 추모하며"라는 헌사로 시작하는 중편소설 '고도에서'다. 190cm는 훌쩍 넘는 거구의 중년 남성이 하루하루 몸무게가 가벼워지며 겪는 이 짧은 작품은 리처드 매드슨의 중편 '줄어드는 남자'에 많은 부분 신세를 지고 있다. 하루에 0.36cm씩 줄어드는 주인공 스콧이 겪는 소외와 사투를 그린다. 그는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150cm에 치유의 희망을, 120cm에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15cm에는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그리고 1.8cm에 이르러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도 잃어버린다.
그럼 스콧이 키 대신 몸무게가 줄었다면 어땠을까. '고도에서'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답변은 전에 없이 따뜻하고 뭉클하며, 아름답다. 줄어드는 남자와 이름마저도 똑같은 '가벼워지는 남자' 스콧은 작은 마을에서 고양이와 살고 있는 홀아비다. 평범한 삶이었다. 어느날 자신의 몸무게가 하루에 0.5kg서 1kg씩 꼬박꼬박 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의 삶은 바뀌기 시작한다.
중력이 끌어당기는 건 몸뿐만이 아니였던 모양이다. 몸이 가벼워질수록, 거구의 몸을 지탱하기에 급급했던 근육에 힘이 남아돌수록 스콧은 여유와 활력을 얻는다. 한층 넓어진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최근 동네로 이사 온 레즈비언 부부와 그들을 대하는 작은 마을의 (조용하지만) 편협한 태도다. "우리 엄마가 저기는 가지 말라고 했어요. 좋은 아줌마들이 아니라서요." "레즈비언이래요." 아이들의 입에서 삐져나온 혐오는 공포소설 이상의 섬찟함을 느끼게 한다. 고립된 공동체의 광기를 그려내는데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 작가인지라 이쯤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사태로 급선회할 수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작품은 스콧의 가벼워진 발거음만큼이나 사뿐사뿐 성큼성큼 화해와 포용의 길로 나아간다.
"고도(elevation)에 오른 기분이 들어요."
똑같이 영(零)으로 수렴하지만 키와 몸무게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스콧. '사라지기 전에 적어도 하나라도 바로잡기 위해' 타인의 존엄성을 바로 세우는 일에 전념하는 스콧. 전자가 이윽고 사라지는 존재가 느낄 법한 절박한 공포감을 그려냈다면, 후자는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이 얼마나 품격있게 마지막까지 살아낼 수 있는지를 담아낸다.
'고도에서'는 소품(小品)이다. 작가의 장편에서 느낄 수 있는 응축된 귀기(鬼氣)도,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다 단번에 터져나오는 공포도 없다. 하지만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의 힘은 문장 하나를 써도 드러나는 법이다. 그의 단편선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다. 작품 중간중간 양념처럼 가미된 '스티븐 킹 월드'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20세기 가장 훌륭한 환상 소설." 스티븐 킹이 '줄어드는 남자'에 바쳤던 헌사를 이제 그대로 그에게 돌려줘도 될 듯 싶다. 아, 숫자 하나는 고쳐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