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무엇일까.
최장순. 이 책의 저자다. 20여년 전, 내 36개월의 공군 장교생활 중 24개월을 함께 했던 선배이자 동료였다. 처음 소위로 임관해서 어리버리하던 내게는 1년 선배 장교의 각잡힌 동작과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철학적이고 진중한 사람들도 소소하고 재미있을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좋게 말하면 철학적이고, 꼬아서 보면 폼잡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게 진짜 멋있어 보이기는 했다. 함께 근무했던 병사들의 눈에도 멋있게 보였는지 우러러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에게 교육받은 훈련병들도 자신의 소대장이 다른 소대장보다 멋지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고는 했다.
나랑은 한 학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형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중함 때문인지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전공은 언어학이었다. 나는 언어학이 무엇인지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그는 언어학이란 철학이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그렇다. 그의 온 몸에서 묻어나는 '폼'은 철학적인 삶의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었다. 남자가 어설프게 폼을 잡으면, 이른바 '훗까시 잡는다'며 폄하되기 쉽다. 그가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군이라는 제한된 환경에서 그것도 선배로 만나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참 멋지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전역 이후에 대학신문이라는 곳에 들어가 기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글쓰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조금 시간이 더 지난 후에는, 광고회사에서 역량을 폭발시키며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어느 날, 드디어 책을 썼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 책의 이름이 바로 '본질의 발견'이었다. 제목 참 이 형 답게 지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평생을 수험서나 교과서가 아니면 책을 보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그게 벌써 6년 전의 일이었다. 기회가 생겨, 수년 만에 다시 책을 읽게 되었다. 똑같은 책이었지만 6년 전에 교사의 시각으로 봤던 책과, 장학사 생활 만 5년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이 시점에 다시 읽은 책은 분명 다르게 다가왔다. 6년 전에 봤던 책은 무엇인가 나와는 다른 세계의 느낌이 강했는데, 다시 읽게 된 책은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철학적인 멋쟁이의 책답게, 첫 장부터 플라톤의 철학이 등장한다. 과거에는 소비자들이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던 죄수들처럼 브랜더와 마케터가 만든 사물의 그림자에 속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소비자들이 속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소비자에게 진실의 관점을 보여주는 도구들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의 그림자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를 혁신해야 한다. 소비자들을 속이지 않는 진정성이 기본으로 전제되어야, 소비자들에게 배신감을 주지 않는다. 브랜드 실체를 은혜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컨셉, 겉만 번지르르한 이미지로 소비자를 기만하지 않는 컨셉, 그것이 최선의 컨셉이다. 남들이 다 알고 있는 실체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숙고해보는 것, 당연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왜 그래야 하는지 본질적 성찰을 던져보는 것,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일을 하는지를 깊게 고민해보는 것, 그것이 진정 차별화된 컨셉션의 시작이다.
내가 장학사가 되고 나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 바로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또는 '내가 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였다. 이런 일을 왜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의 기본적인 구조였기 때문이다. 장학사로서 누군가 내 진심을 알아주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냥 내가 하는 일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성취감은 없을 듯 하다. 이러한 맥락 때문인지, 이 책을 머리로 이해하려 노력했던 6년 전과는 다르게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컨셉의 공식 BEAT
저자는 제대로 된 컨셉션은 '소비자'와 '업의 본질'이라는 두 축을 강력한 버팀목으로 상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업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기반으로 소비자를 위한 컨셉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컨셉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바로 '사람'이다. 컨셉션의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틀은 'BEAT'라고 부르는데, 이는 컨셉의 공식이자 진정한 차별화를 위한 이기는 컨셉 방법론이다.
딱딱한 행정이 내가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수 많은 민원을 대하다보면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그 이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숨어있어 허탈함을 줄 때도 많다.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하다보면, '본질은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게 된다. 물론, 나는 공무원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의 질문이 따라오기에 어느 시점에서는 멈추게 된다. 지금 이 시점에 이 책을 읽어보니, 마케팅 업계에서만 참고할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의 사례, '마음씀'의 철학이 답이다.
인천공항은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수 많은 나라의 공항에서 인천공항을 배우고자 찾아와서 연구를 하며 배우고 싶어하는데, 인천공항이 좋은 평가를 받는 뚜렷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인천공항의 사례를 BEAT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공항은 그냥 사람들이 와서 비행기 타고 가는 곳이 아니었다. 즐겁고 행복한 여행을 지원하는 곳이다. 저자는 인천공항의 서비스 철학을 '마음씀'으로 정의했다. 마음은 머무르는 속성을, 씀은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는 의미를 담았다. 영어로는 'Thoughthfulness'로 표현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가 만났을 때, 물을 마시다가 체할까 염려되어 천천히 드시라는 의미로 넣은 나뭇잎 한 장의 이야기로 마음씀 정신을 설명했다. 타자의 입장에서 머물고, 타자의 만족을 위해 움직이는 정신이 그것이다.
마케팅이 무엇인지, 본질을 추출해내고 컨셉을 잡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명쾌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이 한 일을 왜 이렇게 했는지 설명을 할 때, 이렇게 잘 설명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느낌이었다. 옛날에도 느꼈지만, 이 형 말 참 잘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가 쓴 글을 오랜 시간 뒤에 읽었을 뿐인데, 내 앞에서 무엇인가를 나한테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주제를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이 형처럼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부러움이 더 컸다.
골프의 본질, Play Different
저자가 설명한 또 하나의 사례는 스크린골프 회사의 컨설팅이었다. 스크린골프를 '플레이를 하는 비지니스'로 정의하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으로 접근하였다.
6년 전에는 스크린 골프를 단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기에, 이 부분을 읽을 때 공감되는 부분이 크지 않았다. 비록 한 두차례의 경험이지만, 지금은 스크린골프도 해보고 필드에서의 골프도 해봤기에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기에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스크린골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참 잘 짚어주었던 것 같다.
본질이 무엇인지 정의를 하면, 이후의 작업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 했다. 교육청에서 장학사 생활을 몇 년 하다보니, 사안의 핵심이 무엇인지 단번에 짚어내는 동료와 선후배들을 보며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자주 있다. 그래서 교육'전문직'원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사안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다. 이 일을 왜 하는지 모르는채 그 일을 할 때는 외줄타기를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존경스럽다.
행정을 할 때는 근거가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 법률에 명시되어 있는 일을 할 때는 업무추진이 수월하지만, 법령에 근거하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할 때는 어떻게든 그럴듯한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 모든 공문의 수문에 '1번'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련 근거이며, 기본계획 결재문서도 관련 근거를 명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일을 하게 되는 배경을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하고, 목적을 설명하고, 업무추진의 방향과 원칙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공문이다. 내가 매일같이 하는 일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공무원이 이러한 방식으로 내용과 주제만 달리해서 똑같은 패턴으로 하다보면, 말 그대로 공문을 생산하는 기계가 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그 근거라는 것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관심이 갈 때가 있다. 법률이 왜 제정되었는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조항이 개정되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볼 때가 있다. 이렇게 알게 된 지식은 그 일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도 연쇄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의 이유를 깨닫게 되면, 내가 하는 일의 의미도 찾을 수 있다.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은 남도 납득시키기 어렵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은 무엇일까.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누군가를 힘들게하는 의미없는 꼰대질만은 아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