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청소년들의 농구 문화. 다시 농구의 시대가 오기를.
누구에게나 ‘삶의 결정적인 순간’이 있을 수 있다.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서 영감을 받을 수도 있고, 인생의 롤모델이 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결정적인 순간이 꼭 찰나의 특별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오랜 기간 은은하게 영향을 주는 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역사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의 내 삶에 있어 가장 감사한 부분은, 좋아했던 일이 직업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졌으며, 현재의 업무적 관심사도 과거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40년이 조금 넘은 길지 않은 역사, 지금의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진 맥락을 되돌아보면 참 많은 감사한 순간들과 즐거운 기억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물론, 과거의 기억이기에 힘들었던 기억까지도 보정되어 미화되었을 확률도 높다. 나의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는데 객관적이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스포츠를 가장 잘 하느냐고 묻는다면, (체육 교사 출신으로서 부끄러운 대답이겠지만) 자신있게 나는 이 종목을 잘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종목이 없다. 부족함과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종목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질문을 바꾸어 '어떤 스포츠에 가장 애착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종목은 '농구'라고 자신있게 말을 할 것 같다. 농구가 좋아서 농구를 많이 하다보니 여러가지 경험들을 하게 되었고, 체육교육 전공까지 하게 되었으며, 체육 교사가 되었고, 학교체육을 담당하는 장학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서 눈을 맞추고 함께 호흡하며 땀을 흘리는 것이 중요한 스포츠와 체육 분야, 그리고 학교체육 관련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2021년 현재의 상황은 너무나도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는 학생들이 등교하며, 체육 수업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농구라는 스포츠를 통해서 아쉬움을 달래는 방법은 없을지 고민하게 된다.
농구의 교육적 가치와 방법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농구가 왜 재미있는 스포츠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왜 배나온 아저씨들이 농구를 잊지 못하고 농구장으로 향하는지 생각을 해 보려고 한다. 그 첫번째는 배나온 아저씨의 일원인 내가 왜 농구에 빠져서 살았는지를 정리해 본다. 혹시, 이 글을 보신 분들 중 내 농구실력의 실체를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커밍아웃하지 마시고 가슴 속에 담아두시기를 부탁드린다. 농구 실력이 별 볼일 없다고 해서 농구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니, 예쁘게 봐 주시리라 믿고 감히 끄적임을 시작한다.
농구의 매력, Nothing but net !!
중학교 때부터인가, 친구들에게 농구를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사춘기 허세같은 바람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운동을 잘 한다는 착각에 빠져있던 것은 아니었다. 국민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키는 컸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힘도 부족했고, 순발력도 없었고, 그리 빠르지도 않았다. 유치원도 다녀본 적이 없었고, 그 흔한 태권도장도 다녀보지 못했기에, 체육이나 스포츠 관한 자신감은 거의 형성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반 대표로 체육대회 이어달리기 경기에 나가는 빠른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기억도 있다.
내가 운동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것은 동네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기 시작하면부터였다. 동네 농구장에서 아저씨들, 형들이 농구 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구석에서 흉내내고 따라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키가 점점 커지면서 아저씨들, 형들이 가끔씩 농구 경기에 끼워 주기 시작하였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혼자만의 시간에도 농구장에 가서 혼자 연습을 하게 만든 동기였다.
당시에 깊이있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지만, 신체적 조건의 차이가 큰 사춘기에, 상대적으로 큰 키와 신체조건의 차이에서 오는 운동능력의 우위를 활용할 수 있는 농구라는 종목의 특성 때문에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누군가 잘 한다고 말을 해 주면 스스로도 잘 한다고 착각하게 된다고 하는데, 나에게 농구가 딱 그런 부분이었던 것 같다. 80년대 말~90년대 초 농구 붐으로 농구를 잘 하는 학생들이 친구들로부터 인정받았던 문화적 시대상도 농구를 잘 하고 싶다는 동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성인이 된 지금의 시각에서 과거를 분석적으로 돌아봤을 때의 이야기다. 사실, 내가 농구에 빠져 있던 특별한 이유는 없다. 농구가 재미있었고, 농구를 할 때 즐거웠기 때문에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스포츠가 한 사람을 몰입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즐거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농구란 본질적으로 즐거운 놀이였던 것이다.
공이 네트를 통과하는 순간의 짜릿함, 아니 네트에 '꽂히는' 순간의 짜릿함은 설명하기 어렵다. 혼자서 연습을 할 때도 짜릿하지만, 실제 경기를 하면서 상대의 저항을 뚫어내고 성공시켰을 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형용사가 따로 떠오르지 않지만, 농구 경기의 본질적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짧은 호흡과 빠른 순간이 연속되는 농구 경기에서 이 짜릿함이 계속 되기에 우리는 힘들어도 뛰고 또 뛸 수 있지 않을까.
90년대 초 농구장에서 땀을 흘렸던 학생들에게 농구라는 종목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체육 교육의 관점에서 지금 드는 생각은, 농구라는 스포츠의 ‘팀 스포츠이면서도 개인화된 측면’에 있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을 하면 농구는 혼자서 기술연습을 해서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용이한 팀 스포츠 종목이다. 3점슛을 잘 넣고 싶으면 혼자 농구장에서 수 백 번, 수 천 번 연습을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잘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기도 하다. 무엇인가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연습한 나의 기술을, 농구를 잘 한다고 거들먹 거리는 친구들 앞에서 성공했을 때의 짜릿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까지 나를 우습게 보았던 그 친구들과 농구로 하나되는 기적같은 순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스포츠맨십과 유대감에 농구의 가장 큰 매력이 있지 않았을까.
그 시절의 동네 농구장 문화
1990년대 초, 농구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었다. 농구의 본고장 NBA에서는 마이클 조던이 첫 번째 '쓰리핏(three-peat)'을 달성했고, TV에서는 '마지막승부' 드라마가 대 히트를 쳤으며, 모든 청소년들이 만화 '슬램덩크'를 읽었고, 농구대잔치 대회에서는 전설의 '허동택 트리오(허재, 강동희, 김유택)'에 오빠부대를 몰고다니는 대학팀들이 도전하고 있었다. 과소비가 비판받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어조던'은 없어서 못 살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으며, 에어조던을 신지 못하는 학생들은 '샤크'나 '페니' 등의 농구화로 아쉬움을 달랬다.
폭발적인 농구의 인기였지만, 엘리트 선수가 아닌 학생이 농구를 배울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학교 체육 수업시간에도 농구를 제대로 배우기는 힘들었다. 중학교 3년 동안 3~4주 정도의 짧은 기간, 그것도 학급당 60명 정도 되는 환경에서 농구를 제대로 배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레이업 슛 한 번 하는 실기평가를 하는데도 2~3차시가 소요될 정도였으니, 경기를 한다던지 수준높은 기술을 배우는 것은 사치였을 것이다. 학교체육에서 농구를 위한 전용 시설은 그림의 떡이었으며, 그나마 존재했던 흙으로 된 운동장 한 켠에 놓여 있는 2~3개의 농구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 역시 치열했다. 결국,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학교에서 농구 조금 한다는 상급생들이었고, 하급생 중에 잘 하는 학생들이 선배들의 '간택'을 받아 참여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농구 실력을 갈고 닦았다. 수 많은 동네 농구장에서 나름대로의 꿈을 위해 연습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농구공 하나만 있으면 5~10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 흙운동장과 농구골대가 있었다. 모든 지역이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범위의 세상에서는 대부분 이 정도의 환경은 되었다. 누구나 메인스트림(?) 농구장 진출을 꿈꾸며 칼을 갈 수 있는 곳이 지척에 있었기에, 자신의 실력에 맞게 농구를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인프라와 분위기는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를 떠올려보면, 아파트 단지마다 테니스장과 농구장이 있었다. 물론, 방과후에도 학교 운동장이 개방되어 있었지만, 그 학교 학생들이 아닌 경우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저씨들, 형들이 모이는 농구장은 따로 있었다. 예를 들면, 2단지 농구장에는 2단지 농구장 사람들이 있고, 3단지 농구장에는 3단지 농구장 사람들이 있는 식이었다. 농구장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흙바닥 운동장에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비루해 보이는 농구 골대 1~2개가 있을 뿐이었다. 그시절 우리들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멋진 바닥의 농구장은 스포츠 용품 기업에서 주최하는 3대3 길거리 농구대회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멋있는 농구장이 아니라, 그냥 농구할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네 농구장 문화가 참 재미있었다. 누군가 주로 농구를 하는 곳이 있다면 그 농구장은 그 사람의 홈 코트처럼 여겨졌다. 그 농구장에서 자주 농구를 하던 사람들은 서로 친해지기 마련이었고, 가끔은 함께 팀을 이루러 다른 농구장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마치, 90년대 일본 학원폭력 만화처럼 '우리는 어느 동네의 누구다. 우리가 너희 동네를 접수하러 왔다.'고 도전장을 던지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농구 커뮤니티, 농구 네트워크'는 학교를 넘어 지역을 넘어 확산되었다. 이른바, 농구 조금 한다는 사람들은 저절로 연결이 되었던 것이다. 작게 보면 동네 수준이었지만, 크게 보면 농구하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농구 제일 잘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인정하는 농구장도 있었다. 예를 들면, 양재천변의 '개포 5단지 농구장'은 강남권에서 가장 유명한 농구장이었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농구장'은 강북권에서 가장 유명한 농구장이었다. 한강 고수부지 농구장도 나름 핫한 곳이었는데, '이촌동 한강 고수부지 농구장'에 가면 미군과 농구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농구장 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더욱 재미있다. 열정적인 사춘기 소년들의 세계관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강 이러한 패턴이다. 동네 농구장 죽돌이들이 오늘도 모여서 농구를 한다. 잠시 쉬며 잡담을 나누다가 '00농구장에 00를 잘 하는 애가 있다더라. 너 누군지 아냐?'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연히 결론은 가서 한 번 붙어보자는 것이고, 날을 잡는다. 날을 잡아서 찾아간 00농구장에서 이방인인 우리들이 어슬렁대고 있으면, 00농구장의 죽돌이들이 와서 한 게임 하자고 하기 마련이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농구 한 게임을 시작했지만, 경기를 하다가 보면 서로간에 '얘네들이 걔네들이구나!' 하는 느낌이 오는 순간이 있다. '오, 생각보다 더 잘 하는데?' 아니면 '뭐야? 별 거 아니잖어?'하는 혈기왕성한 중고등학생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이콘택을 하며 즐겁게 농구를 한다. 이기면 기분은 정말 끝내주지만, 그 동네 농구장이기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고 '운이 좋아서 이겼네요.' 하면서 겸손한 척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지고 나면 '원래 우리가 더 잘 하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농구 골대가 이상하다.', '뽀록이 터져서 졌다.', '우리 폼이 더 멋지다.' 등의 옹졸한 정신승리가 연속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어쨌든 그렇게 친구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의 학창시절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던 '평범한 학생들'의 농구 대회
학교스포츠클럽 대회가 학생들의 삶 속에 자리잡은지도 벌써 십여년이 지났다. 체육 교사로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대회에 참가하면서, 그리고 장학사로서 학교스포츠클럽대회를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요즘 학생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우리 때 이런 대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를 끊임없이 되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번듯한 체육관에서 전광판에 우리 팀의 이름이 나오고, 심판복을 입은 진짜 심판이 있고, 관중석에 우리를 응원하는 관중이 있는 진짜 경기. 우리들의 꿈이었다.
지금처럼, 학교스포츠클럽 활동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시스템도 없었고, 학교체육진흥법과 같은 멋들어진 법도 없던 시절에도 대회는 있었다. 기업들의 상업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회, 지자체들의 생활체육 활성화를 위한 대회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대회들이 저마다의 역사를 가지고 개최되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대회라는 경기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우리 동네 구청장배 3대3 농구대회였던 것 같다. 중2병의 허세 가득한 자신감으로 당연히 우승할 줄 알고 나갔던 대회에서 4강인가 8강에서 떨어진 후 운이 좋지 않아 패배했다는 정신승리를 했었다. 머리 속에 남아있던 기억 중 인상적인 것은 대회를 통해 옆 동네의 잘 하는 친구들과 알고 지내게 되었고 간간히 서로의 동네로 가서 농구를 함께 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느 학교의 누구누구'들은 네트워크를 확산해 나갔었다.
90년대 농구 소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타오르게 했던 대회들은 스포츠 브랜드가 개최한 농구대회들이었다. 이런 대회들은 지역별 예선을 통해 전국 최강자를 가리는 형식이었고, 무엇보다 좋아했던 것은 참가팀 모두에게 제공되는 티셔츠나 농구공 등의 기념품이었다. 만약에 입상에 성공한다면 엄청난 금액 상당의 스포츠용품을 받을 수도 있었다. 거의 모든 대회를 나갔던 기억이 나는데, 지역별 조별 토너먼트를 통과하여 전국 결선에 나갔던 적은 딱 한 번인가 있었던 것 같다. 이기던 지던 친구들과 참 즐겁게 농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은 넓고 잘 하는 팀도 참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중학교 3학년 때인가 한강 이촌지구 농구장에서 벌어진 한 브랜드의 농구대회에서 엄청난 실력의 형들을 봤었는데 아직도 '돌풍'이라는 팀 이름이 기억난다. 물론, 이 때는 나중에 대학교에서 이 팀의 핵심이었던 형들을 만나서 같이 농구를 하게될 줄은 몰랐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네에서 내가 제일 잘 한다고 거들먹거리던 사춘기 남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을 갖추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시간은 오래 걸렸을지언정, 자연스럽게 스포츠의 본질인 경쟁과 존중을 배울 수 있었던 당시의 경험들이 참 감사한 일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마침내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체육관이 있는 학교였고, '농구 써클'이 있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나무바닥도 아닌 시멘트 바닥의 체육관이었지만, 점심시간과 방과후에 체육관에서 농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행복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불공평한 일이지만, 그 당시 우리 학교에서 체육관에서 농구를 할 수 있는 행복은 농구 써클에게만 허락되었었다. 다행히도 중학교 때 열심히 농구를 하러 다녀서인지 농구 써클에 들어갈 수 있었고, 체육관에서 5대5로 진짜 농구경기를 하는 행복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봄, 드디어 우리 학교 농구팀이 참가하는 대회가 열렸다. 강동구 둔촌동에 소재한 '한국사회체육센터(SAKA)'에서 주관하는 농구대회였는데,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회이기도 했다. 학교 사정으로 팀의 주축이었던 3학년 선배들이 농구 써클 활동을 중단하게 되면서 1학년이었던 내게 갑작스럽게 주전으로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 때도 그렇고, 나중에 대학교 농구동아리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팀에서 키가 제일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센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기에 조금이라도 더 뛸 수만 있다면 포지션 같은 것은 관계 없었기에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 해서 뛰고 또 뛰었다. 당시 우리 팀은 조금은 투박하지만 미칠듯한 열정으로 풀코트 프레스를 하고 속공을 하는 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안정적이지 않은 무엇인가 말도 안되는 스타일이었는데, 어쨌든 체력으로 기술력있는 팀들을 이기는 그런 팀이었다. 첫 출전한 농구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나는 농구에 더 빠져들었다. 당시에 결승전에서 상대했던 고등학교의 주 득점원이었던 형을 나중에 대학교에서 우리 농구 동아리 에이스 슈터로 만나서 더욱 신기했던 기억도 난다.
여름에는 더욱 기대했던 대회가 열렸다. 스포츠음료 브랜드에서 개최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고등학교 동아리 농구대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에 개최되는 결승 토너먼트는 공중파 중계방송까지 되는 대단한 축제였다. 서울 변두리 촌놈이 몇 주간 개최된 예선을 한다고 서울의 반대편 끝까지 다니면서 너무 재미있게 농구를 했었다. 중학교 수준에서는 1학년과 3학년의 차이가 크지만, 고등학교 이상의 경우 학년의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1학년이었지만 경기에서도 나름대로 즐기면서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예선을 통과하고 꿈의 무대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부산의 한 고등학교와의 결선 토너먼트 첫 경기. 나도 그렇고, 우리 팀 전체적으로 의욕만 앞섰지 몸 상태도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대패하면서 나의 첫 전국대회가 끝나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고등학교 2년 동안 다양한 농구대회에 참가하면서 참 즐겁게 학창시절을 보냈었다. 대학교에 가면 정말 제대로 농구를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체육 교사가 되겠다는 결심 이후, 고등학교 3학년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목표했던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제 대학교 동아리 무대를 접수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자신감으로 들어선 우리 학교 체육관에서 나는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보았던 '농구를 정말 끝내주게 잘 하는 형들'을 다시 만나며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이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같이 농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고, 다행히도 팀에 들어갈 수 있어 너무 행복하게 농구를 했다. 대학교 생활은 그야말로 즐거움 그 자체였다. 전공도 체육교육에 주말이면 농구를 하러 여러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연습경기를 했다. 당시에 우리 팀의 실력이 너무 좋아서 초대받는 경우도 많았고, 각종 대회에서 만나서 경기를 했던 사람들과 이후에도 다른 자리에서 함께 농구를 하게 되는 등의 즐거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교육부·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초·중·고 수준의 체계적인 학교스포츠클럽대회처럼, 대학교 수준에서도 한국대학스포츠협의회(K.U.S.F.)에서 주관하는 스포츠클럽 챔피언십이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십여년 전만 해도 대학교 수준의 농구 동아리 대회는 각 대학교의 총장배 농구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도권 지역에서 개최되는 각 대학교 총장배 농구대회는 거의 다 참여했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선배들이 농구를 워낙 잘 했기에 대부분의 대회에서 우승 아니면 준우승을 했었다. 우승 트로피가 많아서인지 대회마다 돌아가면서 트로피를 집에 가져갔는데, 내게도 기회가 와서 집에 가져가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트로피가 있을 정도였다. 실력이 부족하여 팀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잘 되는 팀이 무엇인지 이기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팀이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것 등의 팀 스포츠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경험하며 배웠던 것 같다. 내가 잘 하고 지는 것보다는 내가 못 하더라도 팀이 이기는 것에 우선을 두고 즐겁게 농구를 했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역사를 주욱 늘어놓다보니 그 때 했던 말과 생각들이 떠올라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이제는 그 시절 우리가 꿈을 꾸었던 환경에서 체계적인 대회들이 유기적으로 운영되는 세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경기가 유튜브로 중계되어 추억을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둘 수도 있는 시대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농구를 하지 못했었다고 억울하지는 않은 것을 보면, 정말 즐겁게 원 없이 농구를 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전문적인 선수는 아니었어도, 한 없이 어설픈 실력의 아마츄어 동호인에 불과했어도, 농구를 정말 좋아하고 즐겁게 했던 것은 확실하다.
다시 농구의 시대가 오기를...
중학교에서 농구 수업을 하고, 농구 스포츠클럽을 지도하고, 농구 경기를 데리고 다니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아이들의 삶 속에서 농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발전하여 즐길 수 있는 스포츠 문화의 폭이 넓어진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농구를 하는 사람들과 그 문화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대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21세기도 벌써 20년이 훨씬 더 지나버린 세상이지만,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농구 선수들은 80~90년대에 뛰었던 선수들이다. 십여 년 전 우리 중학교 농구동아리 학생들을 데리고 KBL 삼성 썬더스 홈 경기에 갔을 때, '누가 가장 유명한 선수에요?'라는 학생의 질문에 '벤치에 앉아 있는 이상민 감독'이라고 대답했던 웃픈 기억이 난다.
지난 십여 년의 시간동안 학교에서는 학교스포츠클럽활동이 일상이 되었고, 많은 청소년들이 건강한 여가문화를 즐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비록, 이 과정에서 농구의 인기가 학교스포츠클럽을 활성화시킨 것은 아니지만, 학교스포츠클럽활동을 통한 농구의 확산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실제로, 전국 학교스포츠클럽대회 우승권 팀에서 전문선수로 입문하는 학생들의 사례도 여러 차례 있었다. 즐기는 스포츠와 전문적인 스포츠가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바람직한 문화가 실제로 생겨난 것이다. 좋은 환경에서 마음만 먹으면 농구를 얼마든지 즐길 수 있기에, 체육 교사가 학생들에게 농구의 재미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만 하면 되었다. 농구 수업이 잘 되고 농구 스포츠클럽이 문전성시를 이룰 때, 교사로서 최고의 즐거운 순간이었다.
코로나 상황에서 농구 뿐만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스포츠 문화가 위축되거나 단절되었다. 신체접촉을 경기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농구 경기의 특성 상, 지난 2년 동안 학교 체육 수업에서도 농구는 다루어지기 힘들었다. 신체접촉도 없고, 보다 적은 인원이 안전하게 농구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괜히 고민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2대2 농구 경기를 활성화 하는 방법은 어떨까하는 생각도 든다. 학생들의 전면등교와 함께 다시 농구가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을 가져본다.
2021년. 삶에 지친 아저씨들은 나를 위한 힐링의 시간, 운동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다. 젊은 날 좋아했던 농구공을 한 번 던져보고 싶지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서 언제든지 농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공 튀기는 소리와 함성 소리는 평화로운 아파트 단지에서 사라져야 할 소음이 되어버린 듯 하다.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장면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도 한 몫 거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의 체육공원들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작정하고 채비하여 약속을 잡고 가야하는 곳의 느낌이 강해졌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농구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시들해진 것과 맞물려 우리 주변에 농구장이 많이 없어졌다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학부모가 되어 있었다. 더 늙어 농구하기 힘들어지기 전에 아들과 함께 동네 농구장에서 땀을 흘려보고 싶지만, 농구공 한 번 던져보려면 먼 길을 가야하는 환경에 탓을 돌려보게 된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90년대 그렇게 꿈꾸었던 '딱딱한 바닥에 라인이 그려져 있는' 농구장에 갈 수 있다. 게을러지고 에너지가 없다보니 농구를 하지 않게 된 이유를 괜히 다른 곳에서 찾게 된다. '영광의 시대'가 언제였냐고 묻는 강백호의 질문에 옛날 이야기를 하기는 부끄러운 나이다. 생각난 김에 아들이랑 농구하는 시간을 만들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