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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Nov 13. 2023

좋은 말 탈곡기

어떤 글을 써야 할까

말레이시아에서의 늘 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어떻게 꾸미고 나갈까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그날의 스타일링은 검정 레깅스에 헐렁하고 큰(요새는 이런 걸 박시하고 루즈한이라고 한다지) 티로 복장은 심플하게, 대신 화장과 장신구를 화려하게 연출했다. 갖고 있는 귀걸이 중에 제일 큰 거, 반지, 팔찌, 목걸이 걸 수 있는 만큼 걸고 나갔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원주민을 떠올릴 정도로.   


나를 보자마자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뭘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나왔어. 

-이렇게 해 보고 싶었어. 어때?

-이뻐 이뻐 ㅎㅎㅎ      

    

나는 23년 6월 19일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작가 신청을 할 때에 출간 책은커녕 블로그에 꾸준히 작성해 놓은 글도 없었다. 이력은 그냥 텅 빈 상태였다. 한마디로 글쓰기의 왕초보이다. 그래도 브런치에 도전해 보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으니.      


바야흐로 1년 전 이맘 때 본격적으로 글쓰기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특별히 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훌륭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곳은 단주 커뮤니티이다. 그 커뮤니티에는 글을 잘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난 회원님이 한 분 계신다. 그분의 글을 읽다 보니 나도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내가 글 잘 쓰는 그분의 글을 보고 따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부분은 바로 ‘인용’이었다.      



니체가,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누가, 영화에서, 소설에서 

     


이런 인용이 들어가는 글을 보면 멋지고 말 그대로 ‘있어 보였다’. 나도 이런 글을 흉내내기로 했다. 글쓰기의 기본은 모르겠고, 무작정 떠오르는 생각을 쓰기 시작했다. 인용을 글 안에 녹여내는 참고를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 


약 1년 넘게 내가 쓴 글들을 모아 굵고 짧게 표현하자면 ‘좋은 말 탈곡기’라고 하고 싶다.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삶의 지혜에 한 숟가락 보탤 수 있는 좋은 말은 물론이고 있어 보이고 멋져 보이는 말들도 바리바리 써 두었다.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어떻게든 나의 글에 녹여내고자 했다.    

  

조금 과장해서 인용 범벅의 글을 써냈다. 내가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최근에 읽은 <무기력의 심리학> 때문이다. 이 책은 불안, 중독, 나쁜 습관에 빠지게 되는 이유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꿀팁을 제공한다. 읽다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상당한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느낀 것은 책의 3장 이후부터 나오는 인용들이 만국 박람회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다양한 책과 박사들의 말이 줄줄이 엮여있다. 한참 읽다 보니 인용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바로 앞에 쓴 글인 <서커스라고 쓰고 균형이라고 읽는다>도 발행을 하고 다시 읽었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투머치.  

    

인용 범벅이다 

     


브런치에서 글을 읽다 보면 인용을 전혀 하지 않고 쓴 글도 많다. 아주 간략한 감정일기나, 시, 또는 수필 형식의 글들은 인용구가 아예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일기도 아닌 짧지 않은 긴 글인데 인용구 하나 없이 자신만의 생각과 필력으로 채워진 글도 있다. 이런 글을 보면 작가님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멋진 글에 대한 나의 개념이 노선을 갈아타고 있다. 요즘은 나도 ‘인용’없이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오늘 페터 비에리의 <자유의 기술> 서문에서......(잠깐..... 인용 없이 글을 쓰고 싶다고 말을 하면서 바로 인용을 하다니.)      


페터 비에리의 <자유의 기술> 서문에서 ‘다른 저자들의 글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고 그저 현상과 사상에 대해서만 논하는 책을 쓰고 싶었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전문 용어 없이 자신의 의견과 논의를 쉬운 말로 풀어서 책을 완성해 기쁘다고 그는 써 놓았다.    

  

스위스 출생의 페터 비에리(파스칼 메르시어)는 베를린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12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보통 지식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줄줄 풀어서 쓸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갖추었다. “내가 인용문 그 자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 <자유의 기술>에는 본인이 쓴 책만 인용했다고 한다.)      


지금 나는 글쓰기 병아리 반에서 이제 졸업할까 말까 한 상태이다. 이런 내가 나만의 사상을 나만의 말로 풀어쓴다는 건 지금으로서는 언감생심이다. 이다음에 쓸 글들도 분명히 인용을 할 것이다. 사상과 철학은 고대로부터 이어지고 돌고 돈다. 완벽하게 새로운 말을 창조하기는 힘들다. 결국 나는 철학자나 심리학자 중 누군가를 소환해서 지지를 받을 것이다.      


결국 균형의 문제로 다시 연결된다. 적재적소에 인용구를 '적당히' 넣기. 


음식을 먹을 때에도 소스가 너무 없으면 심심하고, 소스가 너무 많으면 본연의 맛을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을 때 소스 없이 먹는다. 소스가 들어가면 소스맛만 강렬하게 나기 때문이다. 그 안에 들어가는 재료들만으로도 충분히 풍족하게 맛이 어우러진다고 나는 느낀다.      


반 고흐도 자신만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다른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는 기간만 수 년이었다고 한다. 당장 “다음글부터 인용 없이 갑니다!!”라고 무리수를 둘 생각은 없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의 글이 인용 범벅의 좋은 말 대잔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갈고 또 갈아야겠다. 


자꾸 더할 생각만 하지 말고 뺄 생각을 하면서 나만의 담백한 맛을 찾아가자. 



목표 : 청바지에 흰 티만 입었을 때 가장 예쁘다는 패완몸 같은 글을 쓰기. 





표지그림 : 구스타프 가유보트, <대패질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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