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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Nov 09. 2023

mbti라는 언어의 문법

별걸 다 줄이는 경제적 언어


-엄마 지금 어디야? 

-나, 지금 프아 앞이야.     

 

-엄마, 지금 뭐 해?

-사와전 보고 있어.     


내가 20대 무렵 엄마와 주고받은 문자의 일부이다. 프아는 ‘프리미엄 아울렛’의 준말이고 사와전은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줄임말이다. 엄마는 '별다줄(별걸 다 줄여)'을 즐기셨다. 요즘 사람들이 줄임말을 많이 사용한다고 하지만 줄임말의 역사는 결코 얕지 않다.      


가격의 질이나 양이 만족스럽다는 뜻으로 물건이든 음식이든 퉁쳐서 ‘혜자롭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영조시절에도 휘뚜루마뚜루 사용되던 말로 '탕평하다'가 있었다. ‘탕평하다’는 시니컬한 표현으로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것을 전부 탕평으로 퉁쳐서 ‘탕평갓’, ‘탕평옷’이라고 했다고 한다.      


정조는 ‘행행’이라는 줄임말을 잘 사용했다고 하는데, ‘행복한 행차’를 뜻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산소로 행차하는 그 길이 늘 행복해서 길을 나설 때 ‘행행’이라고 했다 하니 정조 대왕의 센스가 예사롭지 않다.  

    


내가 한국을 떠나온 지 어언 10년. 한국의 실시간 방송은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유행어를 통 접할 길이 없다. 예능을 보면 유행어를 좀 배울 수 있는데 예능도 많이 안 본다. 그나마 캐나다로 넘어와서 즐겨 봤던 것이 ‘무물보(무엇이든 물어보살)’나 ‘연참(연애의 참견)’정도인데 이마저도 근 1년은 안 보고 살았다(최근에 다시 보기 시작). 이러니 ‘여미새’라는 단어를 커뮤니티에서 봤을 때 진짜 존재하는 ‘새’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고, ‘남미새’를 남미에 서식하는 어떤 새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래도 내가 알고 있던 줄임말들이 적지는 않다. 갑분싸, 자만추, 마상, 얼죽아, 마기꾼, 케바케, 믿거, 할말하않, 최애, 팩폭, 세젤예, 솔까말, 만찢남/녀, 현타 등은 알아듣기도 하고 이 중에는 자주 쓰는 말도 있다.     

 

최근에 밴쿠버 지역 커뮤니티에 ‘자부타임 브런치’라는 제목으로 글이 올라왔다. 내용은 브런치 맛집 사진 몇 개 투척이 전부였다. 자부타임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검색을 했더니, ‘자유부인 타임’이란다. 이번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김에 어떤 줄임말들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혼코노(일본말인 줄), 복세편살, 흠좀무, 핑프, 내또출, 스불재(이건 뜻 보고 정말 육성으로 웃음 터짐), 성덕, 점메추/저메추, 붕세권, 고답이 등등 의미를 달아주지 않았으면 도저히 추측도 할 수 없는 줄임말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언어 사용에서 경제성 원리는 다음에 나오는 네 가지 원리로 이루어진다.     

① 청자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말라.
② 두 정보가 밀접한 관련이 있을 때에는 하나의 표현으로 줄여 말하라.
③ 연속되는 단계의 정보가 밀접한 관련이 있을 때에는 그 단계를 줄여 말하라.
④ 정보가 여러 가지이거나 복잡한 경우에는 간단한 표현으로 말하라.     

언어 사용에서의 경제성 원리는 경제 일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투입된 비용과 산출된 결과물에 의해 결정되는 생산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 동일한 양의 인지적·물리적인 노력을 투입하여 더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거나 혹은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면서도 투입된 인지적·물리적 노력이 감소한 표현이라면, 우리는 그 표현이 경제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제성의 원리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 2006. 11. 5., 구인환)     


조지 오웰은 신어를 통해 언어가 어떻게 사고를 통제할 수 있는지를 1984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다. 1984에 나오는 사회는 원래 있던 언어를 축약하고 통합한 ‘신어’를 사용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빨갛다, 붉다, 검붉다, 새빨갛다, 핏빛이다 등의 빨간 계열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붉다’ 하나로 통일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단풍잎, 피, 저녁노을과 같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색을 ‘붉다’ 하나로만 표현하게 된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문법도 중요하지만 ‘어휘 싸움’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친 일본인 학생 중에는 ‘어휘왕’이 있었다. 문법은 엉성한데 어떻게 그리 많은 어휘를 외웠는지, 그가 늘어놓는 어휘만으로도 말하고자 하는 깊은 의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휘의 확장은 발화의 양이나 질의 확장에 그치지 않는다. 사고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도구가 생각을 지배한다’, 즉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상의 한계다.      



몇 년 전부터 붐이 된 MBTI의 열기가 지금도 식지 않고 있다. 식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의 사회적 언어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미국심리학회(APA)는 MBTI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김경일 교수의 말에 의하면 MBTI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결정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되고 싶다'는 선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MBTI에 대한 열광은 문화적 배경, 자기 이해와 타인이해에 대한 관심과 이를 부추기는 대중매체의 영향이 크다. 2021년 말, 천 명을 대상으로 MBTI를 신뢰하는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75.2%가 그렇다고 답했고, 80.6%의 높은 비율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답했다.*

      

어제 설거지를 하며 ‘무물보’를 보았다. 상담을 받은 커플이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출연자가 말했다. 


“장훈 아저씬 진짜 완벽한 T야.”     


T의 특징이 뭔지 몰라서 찾아보았다.      


T 사고형

-모든 상황에서 적용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려 노력
-잘된 일은 칭찬하고 인정하지만 과정상 기울인 노력에는 관심이 적음
-부적절해 보이는 문제 발견 잘 함
-한계를 정하고 공평히 적용
-듣기 시작하면서 해결하고자 함     



이 긴 내용을 ‘T’라는 알파벳 하나로 압축할 수 있으니 얼마나 경제적인가. 우리는 바쁘다. 하지만 알고 싶다.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싶다. 그런데 시간은 빠듯하니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 한다. MBTI는 한국 사람들의 유전자 ‘빨리빨리’에 정말 ‘착붙’이다. 


MBTI는 '별다줄' 경제적인 신조어이다.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구구절절 노래를 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알파벳 4개로 표현하는 경제성의 측면에서 볼 때 MBTI는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효율적으로 빨리 사람을 판단해 버려 진짜 나의 사람을 놓치는 ‘소탐대실’을 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오웰의 1984에서 경고하듯, 사람을 묘사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을 알파벳 고작 4개의 조합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개인의 사고의 확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개인적으로 성향은 이분법으로 나눠진 게 아니라 연장선상에서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구장에서 점수판의 알이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이동 가능하듯이 말이다. 




표지 그림 : Division -Unité Vassily Kandinsky1934/1934


역사 속 신조어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gB7y0vF0qw      

조지 오웰 1984 붉다의 예 참고

https://blog.naver.com/chesto1225/222813686734


*설문조사 

김경일, <타인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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