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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Nov 05. 2023

머시 그리 급헌디

때우지 말고 새기기

  

2020년 늦여름이 지나갈 무렵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상담을 시작한 이유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상담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멀쩡한 아이를 문제가 있다고 느낀 나였다.     

 

심리 상담사 셰팔리 차바리의 <깨어있는 부모> 1장에 부모가 상담사를 찾는 이유가 나온다.     

 

부모들이 상담사를 찾는 이유는, 그들이 성장할 방법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이의 ‘문. 제. 행. 동’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이다.   

  

상담을 받고 2년이 지난 시점에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부모가 상담사를 찾는 이유를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난날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상담 선생님께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아이가 좀 이상한 거 같다고 보무도 당. 당. 하게 말했던 내가 과거에 있었다. 지금은 그저 웃는다. 정말 몰랐다는 걸 알았으니 스스로를 타박하지 않는다.      


상담을 시작할 때,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아이와 나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강력한 느낌은 갖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푸라기는 더하고 더해져 튼튼한 동아줄로 거듭났다. '뼈를 깎는 노력'이라는 금실도 가닥가닥 추가되어 금동아줄을 엮은 시간으로 남았다.     


20대에도 두 번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대학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일본 문부과학성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느라고 1년을 휴학했었다. 2학기에 복학했을 때는 친했던 사람이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다. 늘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고 취업은 내 기대만큼 잘 되지 않았다. 쌀쌀해진 가을의 우울한 냄새가 코에 짙게 스며들었다. 학교 내에 있는 상담센터에서 몇회의 상담을 받았었지만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기억은 없다. 졸업을 하고도 몇 년 동안 가을이 되면 비슷한 냄새가 느껴져서 우울감을 많이 느꼈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려 하니 원하는 곳은 자격미달, 갈 수 있는 곳은 내키지 않았다.  면접의 굴레를 열심히 굴리다가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고 일자리를 잡았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술만 먹고 아주 나쁜 생각도 많이 했으며 소심하게 나쁜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정신의 황폐화를 견디다 못해 모 대학 심리상담센터에서 풀배터리 검사를 받았다. 당시의 심리상태로는 최소 20회 이상의 상담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일단 10회를 시작했다. 갑상샘 수술을 하신 적이 있는, 안경을 쓰고 짧은 단발머리의 눈이 큰 상담사였다. 수술여부를 나에게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매번 목에 얇은 스카프를 두르고 계셨고 언뜻 수술 흉터가 내 눈에 들어왔다.  

    

총 10회 중 딱 한 회만 기억이 난다. 상담사님께 "내가 하는 말들을 선생님이 우습다고 생각하실 거 같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상담을 제대로 받는 방법을 몰랐다. 이건 마치 비싼 학원에 등록하고 가방만 매고 한 시간 앉아 있다가 집에 오는 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예습도 복습도 숙제도 안 하고 자리만 지키고 있었으니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건 자명했다. 


캐나다에서 심리상담을 받을 때 나는 새벽에 일어나 신내림 받은 사람처럼 책을 읽고 적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책을 읽으며 메모를 한 공책이 약 10권 정도 된다. 공책의 두께는 책처럼 두껍고 큰 것부터 얇고 작은 미니 공책도 있다.      




지금도 나는 글을 쓸 때 이 공책들을 뒤적이며 도움을 받는다. 나만의 압축 도서관인 셈이다. 만약 내가 한국에 살아서 책을 모두 종이책으로 구했다면 노트에 정리하지 않았을 것 같다. 캐나다에 살았기에 e-book과 가까워졌고 다시 보기 위해 공책에 옮겨 적었다. e-book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장점 외에는 나에게 큰 매력은 없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시 훌훌 넘겨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 e-book은 여의치가 않다. 나의 공책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독서 정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읽고 싶은 책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식의 섬이 커질수록 무지의 해변이 늘어난다는 말처럼 나는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게 되었다.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많이 읽고 싶어졌다. 그러다 보니 선지식이 있는 내용의 책들은 거의 훑어 읽기를 하게 되었고 필요한 정보만 쏙쏙 찾아내는 ‘검색’ 실력이 상승했다. (이런 능력도 필요하기는 하다. 이동진은 모든 책을 정독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요 몇 개월은 공책에 정리를 하겠다고 독서를 시작하고 몇 챕터 안 가서 다른 책으로 갈아타기의 연속이었다. 빈 공책인 줄 알고 펼치다가 뒷 이야기를 기다리는 여백과 마주치게 된다. 교보 e-book과 책장에는 허준의 의원에 환자들이 몰려와 “줄을 서시오~!”라고 말했듯이 책들이 줄을 서서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전에도 모든 책을 공책에 쓰지는 않았지만 정리하고 싶은 책들에 대한 예의와 성의가 궁해진 요즘이다. 공책에 수기로 옮겨 적을 때에도 어찌나 날림으로 쓰는지 다시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갈 때도 있다. 그렇다. 간절함이 없어졌다. 살만해졌나 보다. 


매일 새벽 4시에 저절로 눈이 떠져서 책을 읽고 필사를 하던 성장의 염원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처럼 책을 들이 파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금맥에서 금을 캐내어 저장하듯 책 안에서 가슴을 후비는 문장을 적어내던 그때를 재현하고 싶어졌다.

      

나는 지금 머시 그렇게 급할까. 무엇에 쫓기고 있는 걸까. 나를 쫓아오는 실체가 있기는 한 걸까. 있다면 그건 아마 조급한 나의 마음일 것이다. 

     

명상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그 안에 필사가 포함된다. 글을 옮겨 적으며 명상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시중에는 명상필사용 책도 따로 판매되고 있다. 명상은 두뇌근육을 단련하는 훈련이다. 명상의 목적은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관찰하며,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다.      


잊고 지냈던 필사명상의 시간을 되살려야겠다. 노트에 한 글자씩 적어나가는 시간이 결코 낭비되는 시간이 아님을 명심하자. 손으로 글자를 적을 때 내 마음은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표지그림 : 추사 김정희,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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