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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Nov 26. 2023

절대 온도 2.7도

당신의 우주와 나의 우주의 온도


지금은 학교에서 무상급식이 제공되지만 나는 도시락 세대이다. 그런데 나의 기억 속의 일화는 학교 급식실이 배경이다. 5학년? 6학년? 그것조차 정확하지 않을 만큼 토막 난 기억이다. 크지 않은 공간에 급식실이 있었다. 아마 몇몇의 결식아동과 선생님들을 위한 급식이었던 것 같다. 그날 내가 왜 도시락을 안 싸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식아동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루는 결식아동이 되어서 급식실에 가게 되었다.     


처음 가 본 곳이니만큼 어색하고 쭈뼛쭈뼛 거리는 내가 보인다. 급식판을 들고 배식 레일을 따라가면서 급식 선생님이 떠 주시는 음식을 받아서 어디에 앉을지 둘러본다. 드문드문 앉아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여럿이 앉아서 웃고 떠들며 먹는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모두 고독한 섬처럼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자기 앞의 식판만 보며 묵묵히 수저를 옮긴다.      


아무도 안 앉아있는 너른 테이블을 발견하고 그곳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막 먹으려고 하는 순간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시선의 경로를 탐색해 보았다. 경로 탐색을 마친 곳에 한 여자아이가 살짝 미소 지은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자기의 식판을 들고 내 앞으로 와서 앉는다.      


내 자리는 아니지만 나는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졌다. 내 식판을 들고 다른 빈자리로 이동해 버린다. 그 여자아이는 굴하지 않고 다시 내 앞에 와서 앉는다.      


“같이 먹자.”     


가슴속에서 불편함이 용트림을 한다.      


“싫어!”     


야멸차게 한 마디 내뱉고 다시 빈자리로 가서 급하게 숟가락질을 하는 어린 내가 있다.      


그 여자아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날 처음 보는 아이였다. 마침 그 아이도 나처럼 하루 급식 체험을 하게 된지라 쑥스러운 차에 나를 보고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왜 그렇게 그 아이의 접근이 불편했을까. 시선의 온도가 따끔했을까.     

 

20대의 어느 시절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일을 하는 곳에 키가 크고 자상하고 섬세한 동갑내기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마침 남자친구가 없었던 나는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관심은 이내 호감으로 발전했고 그를 남자친구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꾸 말을 걸고, 취향을 물어보고, 아르바이트 끝나는 시간을 맞춰서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나는 속전속결로 이 관계를 매듭짓고 싶었다. 사귀냐 안 사귀냐. 남자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주말에 뭐 하냐, 영화 보러 가지 않겠냐, 그 영화 봤냐, 그럼 어디 놀이공원이라도 갈래냐.    

 

“아, 저, 안나 씨..... 너무 서두르시는 거 같아요.....”     


내가 진짜로 벽에 밀어붙인 것도 아닌데 남자는 방어적으로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쩔쩔맸다. 남자의 말을 들은 내 얼굴은 화끈해졌고 가슴은 싸늘하게 식었다.      


   뭐야, 너도 나랑 같은 온도 아니었어?            






잠을 잘 때에는 적당히 시원한 방이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자동 온도 조절 장치가 없는 난방기는 밤이 지나가며 더욱더 방의 온도를 높이기만 한다. 결국 이불을 차 내고 조끼를 벗고 꼼지락 거리며 수면 양말을 벗고 만다. 적절한 선의 온도를 맞추는 것은 예열과 히터를 끄는 타이밍이다.      


상대가 뜨겁게 다가올 때 사람들은 화상을 입기도 한다. 상대의 마음이 너무나 차가울 때에는 동상을 입는다. 꼭 남녀 사이의 애정 관계만이 아니다. 내가 뜨겁게 달아오를 때 상대는 아직 미지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상대는 펄펄 끓는데 내 마음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을 때가 있다.      


저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정작 그 사람은 나에게 빼꼼히 문을 열어줄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제 막 노크를 했는데 문을 활짝 열어 보인다. 들어가도 되는지 오히려 내가 주춤하게 된다. 이내 뒷걸음질 치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과 수다를 떨 때에는 4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간다. 내가 느끼는 세상에서 제일 긴 40초는 인터벌 트레이닝을 할 때의 40초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시간의 속도에 차이가 있듯이 온도의 차이가 있다.     

 

세포 하나하나 문과인 나에게는 낯선 용어이지만 ‘허블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1929년 허블이라는 물리학자가 외부 은하의 후퇴 속도가 거리에 비례하여 커진다는 법칙을 발견했다. 즉, 은하가 멀면 멀수록 더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맞아떨어지는 법칙이다. 사람도 결국 하나의 우주가 아니던가.      


은하 자체는 정지해 있지만 은하와 은하 사이의 공간에 팽창이 이루어진다. 공간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모든 것은 고여 있지 않다. 시간은 흐르고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십 대 아들은 아침에 머리를 감고 습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후드 티 하나만 입고 학교에 간다. 나는 겹겹이 싸매고 나가면서 춥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내가 십 대 때 얇게 입고 다니면 아버지가 꼭 하신 말씀이 있다. 


닭이 맨발로 다닌다고 여름인 줄 아냐.



당신과 내가 느끼는 온도의 차이,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의 공간의 역동. 우리의 온도 차이를 인정할 때 당신의 우주와 나의 우주는 절대 온도를 유지하겠지.      





1964년 운 좋은 두 엔지니어가 우연히 우주 사방에서 쏟아지는 미미한 잡음의 존재를 포착했다. 우주 그 자체에서 쏟아지는 그 잡음의 세기는 절대온도 약 2.7도의 아주 고른 신호였다. 우주  전역에 남아 있는 빅뱅의 잔열, 우주배경복사다. 이는 빅뱅 직후 아주 뜨겁게 들끓고 있던 우주가 꾸준한 팽창으로 인해 아주 차갑고 고르게 식어왔다는 명백한 증거다. 

https://www.bizhankook.com/bk/article/20314




표지 그림 : 뭉크,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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