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Nov 27. 2023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데 찾지는 않을게요

 

작년 이맘때, 코가 맵싸해지는 겨울이 시작되며 한 친구가 그리워졌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P는 28살 무렵 결혼을 하고 신랑을 따라 지방으로 떠난 뒤 연락이 끊어졌다. 실종 사건 같은 추리물이나 수사물이 아닌 점을 밝혀둔다. 핸드폰을 바꾸고 연락처가 날아가고 이런저런 이유로 P의 전화번호가 사라졌다.      


나무가 자라 여름이 되면 이파리가 무성해진다. 계절이 변해 무성했던 나뭇잎의 색이 변하고 하나 둘 떨어진다. 바닥에 나부끼는 나뭇잎이 나무와 영영 멀어지듯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나의 곁에서 사라져 갔다. 살다 보면 사라진 사람들 중 몇몇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진다. 유독 지난겨울부터 P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그리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범람을 했다. 올 3월에 한국을 가기 전에 진지하게 탐정 사무실에 연락을 해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추적까지 한다면 기쁨보다는 공포가 앞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방송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찾고 싶은 오랜 기억 속의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게 마련이다. 초등학교 때 은사, 친구, 동네 짝사랑 누나, 오빠 등등 사연도 다양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애타게 찾는다. 이곳 밴쿠버 커뮤니티에도 종종 사람을 찾는다는 글이 올라온다. 사기꾼 수배글보다는 도움을 주었던 고맙고 그리운 사람을 찾는 글이 더 많다.    

  

내 친구 P에 대한 기억은 이렇다.      


부모님이 모두 치과 의사셨다. 언니와 남동생이 있었다. 집이 아주 컸다. 친구는 엄마가 너무 엄격하고 무서운 분이라고 가까이하기 힘들다고 했었다. 그런 말을 할 때면 눈이 참 슬퍼 보였다. 대신 아빠가 친근하게 대해 주셔서 그래도 아빠와는 가깝게 지낸다고 했을 때는 내 눈이 슬퍼졌다. 자상한 아빠가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P는 공부를 잘했다. 아주 영리한 친구였다. 보통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자기보다 성적이 낮은 아이와 잘 어울리지 않는 데 P는 예외였다. 나와 아주 친했으니까. 심지어는 수학 과외도 함께 하자고 나에게 제안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동네 지하철 역에서 기다리는데 한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질문은 기억이 안 나는데 나에게 먼저 질문을 했고, 나는 내 생각대로 답변을 했다. 이윽고 P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는데 질문을 한 사람도 나도 P의 고등학생 같지 않은 논리 정연하고 명료한 답변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때 나는 내 친구가 경이로워 보이는 동시에 마법의 음료를 마신 앨리스처럼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초라해진 기분도 있었지만 존경심이 더 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P는 신촌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을 했다. 우리는 변함없이 친했다. 나는 P에게 질펀하게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담배 피우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P는 괴로워하면서도 열심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대학 2학년을 마치고 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우리의 심리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만큼 간격이 생기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연락을 하면서도 지금 현재의 사람들에게 더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28살에 P는 결혼을 한다며 예비 신랑 손을 잡고 나를 만나러 왔다. 신랑은 P처럼 참하고 얌전하고 성실하고 똑똑해 보이는 남자였다.      


P의 결혼식에 참석한 이후로 P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SNS를 하지 않는다. 페이스북으로 고등학교까지 공개설정을 해 놓으면 징검다리를 건너듯 건너고 건너 어쩌면 소식이 닿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에는 반가운 마음이 폭주하지만 곧 할 말이 없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너무 닫힌 생각일 수도 있다. 나는 늘 열린 마음으로 살려고 하고 남들한테 열린 마음으로 살라고 하면서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도 잘 안다.      


미유키와 다시 연락을 했더니


사실 오래 연락이 단절되었던 한 친구를 찾은 경험이 있다. 미유키라는 일본 친구인데 내가 일본 대학에서 1년간 연수를 할 때 나의 튜터를 했던 친구이다. 나보다 나이는 몇 살 어렸지만 미유키는 어른스러웠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네에상姉さん(언니)이었다. 사람들을 잘 챙겼고 사려 깊었다. 그랬기에 나도 일본 생활을 하는 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다.      


새해가 시작할 때 기숙사 목욕탕까지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나는 참 당황스러웠다. 어디에도 갈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유키는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자기의 본가에서 새해 연휴를 함께 지내자고 제안해 주었다. 덕분에 날것 그대로의 일본집과 일본인 가족의 문화체험을 할 수 있었다.     

 

여름 방학에는 나 홀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는데,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일본어 교사 체험 연수를 하던 미유키와 친구들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접선을 했다.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피사의 사탑을 함께 둘러보며 20대 다운 진한 우정을 나누었다.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계단을 올라가며 준세이와 아오이가 이 가파른 계단을 숨을 헐떡이며 걸어 올라갔을 생각을 하니 모양이 빠진다는 대화를 나눴던 게 생생하다. 

  

내가 귀국을 한 뒤에도 우리는 손 편지로 소통을 했고 (그때는 인스타나 라인이 없었다) 미유키와 다른 친구는 한국에 놀러 오기도 했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리의 우정도 점점 색이 희미해져 갔다. 미유키에게도 나에게도 끊임없이 새로운 만남이 생겼고 우리는 더 이상 접점을 찾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미유키를 잊은 적은 없다. 말레이시아에서 일본인 엄마들과 친하게 지내며 미유키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엄마들 중에 한 명은 미유키의 사촌 언니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외모도 성격도 비슷했다.    

  

캐나다로 오고 나서 갑자기 미유키가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지금은 안 쓰는 예전 메일 계정을 뚫어서 미유키와 주고받은 이메일이 남아있는지 살펴보았다. 


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미유키가 그 메일 계정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간단하게 영어로 안부를 묻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답장이 왔다. 아주 수려한 영어로 답장을 쓴 미유키의 회신이 온 것이다. 그동안 미유키는 영국에서 유학을 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결혼도 했고 아들을 한 명 낳았다. 서로 아이들 사진도 주고받으며 그렇게 이메일이 오고 가길 수 차례. 오래가지는 못했다. 역시나 접점을 찾기가 어려웠고 대화는 길게 유지가 되질 않았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반가움이 증폭되는 것은 순간이고 잊힘은 찰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P를 억지로 찾지 않기로 했다.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첫사랑은 찾는 게 아니라고. P는 좋은 친구이긴 했지만 그건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지금 P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좋은 추억 속의 스틸 컷으로 남겨두는 것이 과거의 환상을 깨지 않는 우정의 보존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도 우리가 인연이라면 언젠가는 만나겠지...... 보고 싶다. 친구야!! 너는 브런치 안 하니?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을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고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중에서 




표지 그림 : 오딜롱 르동, <꽃구름>





매거진의 이전글 절대 온도 2.7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