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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Dec 07. 2023

어머니는 글쓰기가

싫다고 하셨어

  

엄마가 노골적으로 글쓰기가 싫다고 하시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옛날 지오디의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노래가 생각나서 제목을 어그로성으로 붙여보았다.      


나의 엄마는 엄청난 다독가이시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언제고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어지는 법인가 보다. 내가 이십 대 어느 시기에 엄마는 글을 쓰겠다며 필명도 만드셨고 필명으로 어떤 문인협회에 등록도 하셨다. 엄마가 쓰신 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은 없다. 아닌가, 한 번 정도 읽어 봤으려나. 엄마 성격에 자신의 글을 나에게 보여주셨을 리가 없으니 나는 엄마의 글을 못 읽어봤을 것이다. 심지어는 소설을 쓰셨는지 에세이를 쓰셨는지 장르도 모르니 말이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다 보니 오래전 엄마가 작가를 꿈꾸셨던 일이 생각났다. 나의 브런치 계정을 알려드리지는 않았지만, 글쓰기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엄마에게 왜 계속 글쓰기를 하지 않으셨냐고 여쭸다. 엄마는 자신의 글이 너무 시시해서 글쓰기에 매력을 잃어버렸다고 하셨다. 나는 한창 글쓰기에 의욕이 충만하던 시기여서 그래도 그냥 쓰지 그랬냐고 했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너무 탁월함에만 매몰되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한때 소설가를 꿈꾸었던 적이 있지만 나의 글을 읽으신 엄마의 심드렁한 반응에 마음을 접었다. 그 심드렁함의 화살이 본인에게도 향했구나 싶었다. 어린 시절 받았던 엄마의 시큰둥한 피드백을 원망하면서도 내가 정말로 글쓰기를 사랑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으로 글쓰기를 이어갔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우여곡절이 꼭 남 탓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할 때 어떤 글을 쓸지 나름의 계획과 포부를 밝혀야 한다.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알콜 중독에 관련된 글만 쓰려고 했다. 브런치의 성격이 ‘정보 전달’이라고 하니, 과도한 음주의 문제와 혼술에 대한 경각심 같은 것을 글로써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작가로 선정되어 나의 알콜 중독기를 쓰다 보니 다양한 글감들이 자기를 써 달라며 여기저기에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주제의 스펙트럼을 넓히며 글을 쓰고 있는 중에 갑자기 글쓰기 마음에서 공사중단을 외쳤다. 글 건설사에서 브런치를 갈아엎어 버리고 싶다고 들고 일어났다. 나의 매거진들 사이사이에 다이너마이트를 넣어서 폭파시키고 잔해를 제거한 다음 그곳에 완전히 새로운 건물을 짓고 싶어진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사는 지역의 커뮤니티에 연재된 새 거주민의 밴쿠버 초보 일기이다. 첫 화는 밴쿠버에 정착하며 겪는 말 그대로 좌충우돌 경험 및 정착의 소회를 담은 글이었다. 지역 커뮤니티는 자주 들어가지 않아서 몰랐는데 내가 그분의 첫 글을 읽은 후로 이어서 연재 식으로 글을 올리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 읽기에는 양이 많아서 (그 외에도 읽어야 할 게 너무나 많은 관계로) 몇 개만 골라서 읽어 봤는데 반응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글이 쫀쫀하니 맛있고 찰졌다. 


그래서 나는 졌다. 너무 부러웠다.      

3김 작가를 좋아한다. 김승옥, 김연수, 김영하.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책을 읽으니 표현들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글쓰기를 해볼까 마음 먹은 초반에는 김영하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보면서 진짜 맛깔나게 잘 쓴다고 생각했다. 오에 겐자부로와 김연수의 책을 읽으며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에 갇히는 매력을 느꼈다. 파스칼 키냐르와 오르한 파묵의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감탄을 금치 못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으면서 이 정도 쓸 거 아니면 불안에 대해서는 언급도 못 할 거 같다는 압도적인 경외감도 느꼈다.      


예전에는 이렇게 전문 작가들의 글을 보면서 너무 부럽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부러움의 대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부러움의 대상은 브런치 작가들을 비롯하여 나에게 의문의 일패를 느끼게 한 커뮤니티의 글쟁이이다.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고 찰지게 잘 풀어쓰는 사람들이 있다. 가지 나물 반찬 하나를 놓고도 서사가 펼쳐진다. 특별한 정보성을 지니고 있지 않아도 ‘공감’을 할 수 있는 글이다. 호소력은 있지만 선동적이지 않은 글. 잔잔하게 가슴이 울리는 이런 글이 요즘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인다.      


다시 엄마로 돌아가 보자. 엊그제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엄마가 물으신다.      


요즘도 글 쓰니?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바로 ‘쓰고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느릿하게 “쓰고는 있죠.”라고 답했다. 쓰기는 하지만 잘 쓰고 싶은 욕심, 과도한 자기 검열을 비롯해서 자료를 찾고 조사하고 교정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긴 점들이 글쓰기를 미루게 한다고 했다. 엄마가 이어서 말씀하셨다.    

  


“네가 전에 나한테 왜 글쓰기 그만뒀냐고 물어봤지? 그런 이유 때문이야. 남이 보건 말건 뭐라고 하건 말건 자기 글을 쭉쭉 써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게 안되더라고.”      



이것이 소위 말하는 “내 글 구려병”인 것일까. '내 글 구려병'이라는 병명을 알려준 친구는 내 글이 그런 류의 구림은 아니라고 위로해 주었다. 진짜 구린 지 아닌 지는 모르겠지만 탁월함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

브런치에 만들어 놓은 매거진을 보며 자꾸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아니 어쩌려고 저렇게 판을 키워?’ 내지는 ‘어떻게 수습하려고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영화나 드라마이다. 그런 경우 대부분 허둥지둥 해피 엔딩으로 끝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많은 복선을 깔고 인물 관계를 복잡하게 꼬아 놓고는 갑자기 마지막 회에서 모두 화해하고 웃으며 끝난다. 요즘 나의 브런치를 보면 주제를 자꾸 확장하다가 급하게 짐도 정리 못하고 도망친 황량한 폐건물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한 작가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 글쓰기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단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지구도 지각 대변동을 몇 번을 거듭해서 대륙이 나뉘었고 여전히 꿈틀댄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마지막 이유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발버둥이나 어두운 중독이야기, 이미 차고 넘치는 심리학 관련 이야기보다는 정말 별 거 아닌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진다. 오늘 컴퓨터에서 술 마시던 시절의 암울한 잔상과 관련된 글을 발견했다. 정말 내가 쓴 게 맞나 싶게 탁하고 글자 하나하나에서 어둠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이런 마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내가 중독에서 조금 더 멀어지고 한층 더 평범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좋은 신호는 아닐까 싶다.      



글쓰기에 대한 상념의 글이 벌써 세 번째이다. 상념 그만하고 그냥 쓰자. 





표지 그림 : Jean-Honoré Fragonard, <A Young Girl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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