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망수용 능력
남편이 남자친구였을 때 로또에 당첨된 적이 있다.
실 수령액은 약 백 얼마였다.
3등에서 마지막 공 하나만 숫자가 맞았으면 2등이 될 수도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2등은 당첨금액의 단위가 달랐다. 몇 천 단위로 올라갔으니까 백여 만 원과는 비교불가였다.
남편은 이 사실에 대해 너무나 아까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억울해했다.
한 끗 차이로 수천만 원이 날아갔다고 여겼다. 데이트 중에 몇 번이고 로또 종이를 들여다보며 콧구멍과 귓구멍에서 뜨거운 김을 발사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애초부터 오빠의 돈이 아니었는데 뭘 그리 아까워해요.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잖아요.
남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아까워하는데 너만 이렇게 말해~
몇 천만 원이 날아간 것도 분통스러운데 여자친구가 달래주기는커녕 냉정하게 말을 하니 서운했을 거 같다.
지금 내 정신 영역에서 당시의 나에게 한 마디 해 주고 싶다.
아주 부처님 나셨네
법륜스님에 빙의해서 즉문즉설이라도 할 기세였다. 모든 것을 초월한, 불교의 공사상에 입각한 것 같은 당시의 팩트 폭격성 발언.
이것은 전형적인 원가족의 소통 스타일이다. 공감보다는 사실적시에 가까운 화법이다. 법륜스님과 큰 차이가 있다면 스님께서는 물었으니까 대답해주시는 것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속단하고 타인이 지녀야 하는 마음을 결정해 주는 것은 상당히 자기 중심적이다.
조망수용 능력이라는 것이 있다. 타인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그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조망수용 능력이 전혀 없는 0 수준은 6세 이전으로 자기중심적 관점을 고수한다. 자신의 입장이 곧 타인의 입장이라고 믿는다. 타인의 느낌이 어떠할지 물어보면 자신이 느끼는 것을 말하는 상태이다.
인간관계에서 대화거부 유발자의 특징이 있다.
바로 팩트만 말하는 사람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조망수용 능력의 발달이 0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싶다.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의 <관계의 언어>에서는 '마음 헤아리기'를 강조한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이심전심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그는 타인이기 때문이다. 종종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어찌 감히 타인의 마음을 100%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마음 헤아리기'는 판단을 유보하고 상대의 마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관계의 언어> 프롤로그에서......
만약, 남편의 로또복권이 다시 3등에 당첨된다면 난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꼭 말할 필요는 없다. 자꾸 무슨 말을 해주려고 해서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이다. 그저 관심을 갖고 그의 안타까운 푸념을 잘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표지그림 : Erik Johansseon, <Full Moon Service>, 2016
*조망수용 능력 발달의 5단계
0 수준 : 3~6세, 자신과 타인의 생각과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종종 그 둘을 혼동한다. 자신의 느낌이 곧 상대방의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수준 : 4~9세 정도로 사람들이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조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수준 : 7~12세로 타인이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음을 이해하지만 제한적이다.
3 수준 : 0~15세 정도이며 자신과 상대의 관점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구체적 타인 이해의 능력을 갖게 된다.
4 수준 : 14세 이후. 사회적 가치체계에 근거하여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도덕성을 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