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Jun 17. 2024

네가 가고 싶은 길로 가



2018년 10월, 아들이 7살이 된 해에 우리는 말레이시아의 한 국립공원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국에 설악산이 있고, 미국에 요세미티 국립공원이 있다면 말레이시아엔 타만네가라가 있다. ‘타만’은 공원이고 ‘네가라’는 국립이라는 뜻으로 이름 자체가 ‘국립공원’이다.      


브라질의 아마존이 세계에서 가장 큰 정글이라면 타만네가라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정글이다. 무려 1억 3천 년 동안 빙하기에도 얼지 않고 보존되어 온 자연사 연구 가치도 어마 무시한 곳이다.      


쿠알라룸푸르 이스타나 호텔에서 오전 8시에 출발한 셔틀버스(봉고차)는 3시간을 달려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길이 갈린다.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숙소까지 2시간을 가거나 셔틀을 타고 한 시간 조금 더 갈 수 있다.      


보트를 타고 가면 쉽게 볼 수 없는 멸종 위기의 희귀 동물을 볼 수도 있고 보기 힘든 풍경을 감상할 테니 잠시 갈등이 되었다. 그러나 넘실대는 황토색 물을 저 갸름하고 길쭉한 모터보트를 타고 2시간을 갈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우리는 셔틀 봉고에 남기로 결정했다.   



타만네가라 홈페이지에서 펌


보트를 선택한 신혼부부 팀을 숙소에서 만났는데 신부의 표정에서 '딥빡'이 보였다. 소감을 물어보니 나에게 셔틀을 타길 잘 했다며 장장 두 시간 내내 물과 나무만 보며 왔다고 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던 셔틀을 타고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그날의 가벼운 일정을 소화했고, 다음 날 대망의 정글 산책을 하기 위해 출발했다.      


아르메니아에서 온 신혼부부, 스위스에서 온 청소년 두 명 포함 4인 가족, 그리고 나와 아들 이렇게 8명과 정글에서 나고 자란 정글 토박이 가이드가 한 팀이 되었다.      


정글로 정글로 점점 더 정글스러워지는 산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말하고 싶지만, 2004년에 관광객들을 위해 나무데크로 걷기 편한 길을 닦아 놓은지라 힘든 줄 몰랐다. 


우리가 너무 편하게 가니 가이드가 정글의 맛을 보여주려고 잠깐 옆길로 샜다가 내 아들의 옷에 새까맣게 정글 개미가 달라붙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개미를 털어내는 과정에서 일부 개미가 아들의 옷에 검은 흔적을 남기며 장렬히 전사했다. 정글의 맛을 제대로 봤다.      


이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개미가 아니라 캐노피 워크였다. 무성한 정글을 헤치고 다니지 않게 설치한 다리인데 높이 솟은 나무의 40m 허리춤에 흔들 다리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높이이지만 나무가 무성해서 애써 보지 않으면 그렇게 높은 곳에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철 구조물로 튼튼하게 만든 다리가 아니다 보니 어떤 포인트에서는 한 명씩 건너야 한다. 7살 아이도 예외는 없었다.      


아들을 보고 할 수 있겠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주춤거리더니 신중하게 발을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소란스러운 나와 다르게 침착한 아이다.    

 


지상 40m 위의 다리를 건너는 7세 아들




그로부터 5년 후.


12살이 되어 “엄마 놀자”라는 말보다는 조용히 자기 방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아들을 방에서 끄집어 내기로 했다.     

 

비가 내리는 일요일 오후 아들에게 산책을 제안하자 월마트에 가자고 한다. 그런데 따로 갈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나는 이 아들을 걷게만 할 수 있다면 굳이 같이 걷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집을 출발하여 갈라지는 길이 나오자 아들이 어느 쪽으로 갈 거냐고 묻는다.      


“네가 가고 싶은 길로 가.”      


아들은 학교를 가로질러 간다며 휙 가버렸다. 나는 내가 주로 가던 길로 갔고 합류하는 큰길에서 저 멀리 가고 있는 빨간 우산의 아들을 발견했다.    

  

나랑 걸을 때는 다리가 아프네 발이 아프네 하면서 빨리 못 걷는다고 투덜거리던 녀석이 이제는 언덕길을 나보다 빨리 올라간다.    

  

아들이 쓴 흔들리는 빨간 우산이 나를 먼발치에 두고 횡단보도를 건너가 버렸다. 이렇게 멀리서 아들을 보고 있자니 5년 전 타만네가라의 7살 아들이 떠올랐다.  

    

지상 40m 높이의 흔들 다리에서 무섭다고 울거나 벌벌 떨지 않고 신중하게 발을 내딛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가슴이 웅장해지면서 대견하고 든든했다. 당시 나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출렁이는 다리를
씩씩하게 건너갔듯이
출렁댈 너의 인생도
씩씩하게 살아가렴.





표지그림 : 타만네가라의 숙소 무티아라 타만네가라로 들어가는 셔틀 보트 타는 곳 


*아들에게 허락받고 사진 올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