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꿈
엄마의 꿈은 파독 간호사였다. 간호학과를 다니며 엄마의 지긋지긋한 원가족을 떠나 독일의 품으로 떠날 채비를 착실히 하고 있던 중.
친구의 소개로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톰 크루즈 뺨을 몇 번쯤 때릴 만큼 잘 생긴 얼굴의 아빠에게 홀딱 반한 엄마는 독일대신 서울의 어느 예식장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그 후 엄마는 나를 낳으셨고 나에게 주문을 거셨다.
-수리수리 마수리 너는 외국에 나가서 살아라
물론 저렇게 기묘하게 주문을 걸진 않으셨다. 하지만 나에게 외국에 나가서 살면 좋겠다는 말씀은 자주 하셨다. 이것도 가스라이팅이라면 가스라이팅이 되겠다.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굳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엄마의 바람이 스며들어 자리를 잡은 것인지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마블링이 잘 된 와규처럼 절묘하게 섞여있다.
외국이라고 하면 참 막막하다. 북미, 가까운 일본, 유럽, 동남아 등등 세계 어디에도 한국인은 살고 있다. 이 지구 위에 한국인이 살기 적당히 좋은 나라는 수도 없이 많다. 20대에 일본에서 공부도 했지만 이상하게 일본에서 ‘거주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여름을 좋아하는 나는 사시사철 여름인 동남아에 몹시 끌렸다. 쪽빛 바다를 끼고 있는 어느 나라에서 구릿빛으로 빛나는 피부를 유지하고 싶었다.
가서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했는데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일본어 밖에 없으니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국어 강사가 되기로 했다.
미정의 동남아 어느 나라로 떠나기 위해 한국어 강사의 이력을 쌓아가던 중 남편을 만났다.
나에게는 해외이주의 꿈이 있노라고 거절도 아니고 그의 사랑을 떠보는 것도 아닌 사실을 고하니 남편은 급한 대로 일단 자기도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다고 지르고 보았다.
그렇게 나는 무더운 동남아 대신 어느 겨울, 서울에 있는 근사한 예식장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결혼을 하고 외국으로 나간다던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덜컥 자기 사업을 시작해 버렸다. 사업은 마치 선녀의 날개옷을 숨긴 나무꾼과도 같은 것이어서 날개옷을 잃은 남편은 한국을 떠날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 남편은 나에게 날개옷을 입혀주었고 나 혼자 33개월 된 아들을 안고 말레이시아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로 한국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다. 기러기 가족은 꽤 흔하지만 10년차는 그리 흔하지 않다.
남편과 함께 산 햇수보다 떨어져 산 햇수가 두 배를 넘어서 버렸다. 따로 떨어져 살고 2년쯤 후에 말 그대로 ‘현타’가 왔다. 나는 이게 무슨 부부냐며 귀국을 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남편은 매몰비용을 운운하며 외국에서 살기를 권장강요했다.
내가 갑자기 '가족'운운 하며 귀국을 주장한 것은 일종의 '향수병'이었다. 그 시기가 지나고 나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귀국의 의지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진흙탕에 굴러도 부부는 함께여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가족들이 있다. ‘가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흔히 떠올리는 ‘엄마, 아빠, 자녀’가 한 집에 사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요새는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한 부모 가정이나 조부모 가정에 대한 배려라고 한다.
나에게 그렇게 오래 떨어져 살면 외롭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나의 꿈은 해외 동포이고 남편의 꿈은 잘 아는 사람이 외국에 사는 것이라고.
하필이면 그 '잘 아는 사람'이 아내와 자식일 뿐이다.
우리 부부는 우리의 꿈을 실현하며 외롭지 않게 살고 있기에 지나간 10년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한국에 돌아가 남편과 사는 꿈이다. 그동안 못해준 밥을 해주고 남편의 옷도 개켜주고 싶다.
표지그림 : PHOTO: JOVANAT/GETTY IMAGES
*한국을 떠나 10년을 살면서 겪었던 일들을 꺼내와 조금씩 기록해 보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