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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l 23. 2024

흐린 날이 필요한 이유

너무 맑아도 지친다


밴쿠버는 가을, 겨울, 봄 내내 흐리고 비가 많이 온다. 맑게 개는 날은 그 일수가 적어서 비타민 D를 따로 섭취하는 것은 필수이다. 밴쿠버에 오고 나서 없던 우울증이 생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때로는 고덤시티를 연상케 할 정도로 우중충한 날씨의 밴쿠버가 6월을 기점으로 대 변신을 한다. 6월 7월 8 월, 삼 개월간 세상의 햇빛은 다 끌어온 듯 거의 매일이 맑고 쾌청하고 쨍하다. 


오전 5시 반에 일출이 시작되고 저녁 9시 반이 되면 일몰이 되니 하루 종일 온 집안의 불을 환하게 켜놓고 있는 느낌이다. 


나의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나서 학기 중에 소홀했던 일들에 매진을 한 지 한 달여가 지났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피아노를 치고, 읽고 싶었던 소설들을 실컷 읽고, 운동 시간에 더해 걷기 시간도 늘렸다. 


또한 곧 시작될 한 달간의 여행길에 대비해 이벤트를 찾고 예약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아직 여행은 시작도 안 했는데 무언가 지친 기분이 들었다. 


계획을 너무 열심히 세워서 지친 거 아니냐는 친구의 말에 내가 왜 이렇게 지쳤는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무언가 많이 하기도 했지만 학기 중 공부에 치이는 것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피곤함이다. 


그런데 친구의 "왜 지쳤어?"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아침에 찾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하루도 쉬지 않고 바삭하게 모든 것을 말려버릴 듯한 기세의 '쨍 한 날씨'였다.


내가 지친 이유는 바로 이 시나브로 '맑은 날씨'때문이었다. 오늘은 모처럼 회색빛 하늘이다. 톤 다운된 하늘색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안하고 눈도 피로하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유독 '밝은 성격'의 사람이 있다. 긍정과 낙관으로 중무장을 하고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을 보이는 사람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무한 발사하는 사람들 말이다. 


쉬지 않고 조잘거리고, 내가 하는 말에 시종 농담으로 받아치고, 깔깔거리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 기빨리는  사람과 한 달 동안 여행을 간다고 생각을 해보자. 


분명 처음 며칠은 신날 것이다. 적어도 나는 몇 시간이면 이런 과한 텐션에 귀가 욕구가 간절해질 것이다. 물론 애초에 이런 사람과 함께 여행을 계획하지도 않겠지만. 


우울의 'ㅇ'이나 감성의 'ㄱ'을 꺼내지도 못하게 발랄한 웃음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은 마치 하루도 흐리지 않고 쨍한 맑은 날씨의 피로함과 같다. 


날씨도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아서 때로는 흐린 날이 필요하다. 사람도 때로는 우울함을 느끼거나 감성적이 될 필요가 있다. 더운 날 그늘을 지나갈 때의 휴식처럼 사람에게 그늘 같은 감정은 잠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밝게 사는 것은 긍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나치게 밝은 이면에는 그늘도 더 짙게 깔리게 마련이다. 


아무리 운동이 좋다고 해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회복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적당히 흐릴 줄도 알아야 정서도 쉴 수 있다. 


맑음을 잠시 쉴 수 있는 흐린 하늘이 오늘따라 너무나 고맙다. 





표지그림 :  Martin Johnson Heade, <Sunlight and Shadow: The Newbury Marshes>, (c. 1871–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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