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감정이 아니라 서툰 감정
삐진다는 것은 '화'의 카테고리에 포함된다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경우에 발동하는 방어기제가 '삐짐'이다. 삐진 사람을 보다 확실하게 분노의 길로 이끄는 방법은 "너 삐졌지?"라고 뼈를 때리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자신이 기분이 상했지만 그 이유가 본인이 생각해도 유치할 때,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기분이 상한 건지 포인트를 잡기 어려울 때가 있다.
어떤 지점에서 화가 났는지, 기분이 상했는지 솔직하게 말할 경우 '겨우'나 '고작'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반격을 당할 것이 두려운 경우에 보다 철저하게 삐짐의 땅굴로 숨어 들어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상대가 왜 삐졌는지 현장에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여자아이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아들과 딸을 키우는 부모들은 딸의 가장 큰 단점으로 '잘 삐짐'을 꼽는다. 내가 중학교 때에만 해도 남녀 차별 없이 거의 공평하게 체벌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고 나자 여학생 한정, 체벌이 사라졌다. 어느 날 젊은 국어 선생님이 왜 남학생들에게는 여전히 체벌이 존재하고 여학생들에게는 체벌을 안 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밝혀주었다.
여학생들은 어떤 이유이든 맞고 나면 '삐진다'는 것이었다. 체벌을 당한 여학생은 복도를 지나갈 때에도 해당 선생님에게 인사는커녕 눈을 가늘게 뜨고 흘기고 지나가며 노골적으로 삐짐을 드러내기도 하고 말을 시키면 뚱하게 단답형으로만 몇 날 며칠이고 대답을 한다고 했다.
그 '삐짐'이 두려운 나머지 선생님들이 여학생들의 체벌을 꺼리게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일자 샌드의 <서툰 감정>에서는 분노를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다른 사람이 나의 허영심에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이것이 가장 큰 분노의 원인)
둘째,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지 않는 친밀감이나 동정심을 피력할 때
셋째, 다른 사람이 나의 가치관이나 삶의 원칙과 대립되는 행동을 할 때
넷째, 내가 바라거나 소망하는 것과 반대되는 일이 발생할 때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사람들은 타인의 거절을 자기 존재의 거절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사사로운 일일지라도 본인이 소망하고 있었던 일을 거절당했을 때 분노가 생긴다.
즉, 삐짐은 거절에 대한 이차 감정이다. 삐짐 이면에는 거부당했다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감이 깔려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언행에 대해 지적을 하거나 제안을 거절하는 일은 일상다반사이다. 그것이 그 상대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닌데 삐지는 것은 대단히 미성숙한 대처방식이라고 밖에 할 수 없겠다.
타인의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을 때, "그 말을 들으니 내 기분이 좋지 않구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그런 거 가지고 기분 나빠하고 그래?"라는 반격이 들어온다면 그 상대가 한 말은 더더욱 담아둘 필요가 없다.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다음번'을 기약할 수도 있고 '아님 말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상대방이 나의 제안을 잊지 않고 함께 하자고 했을 때 "왜? 싫다며?"라고 나오는 사람을 누구나 한 번쯤 만나보았을 것이다.
삐지는 어른은 어른이 아니다. 내가 그 상황에서 왜 감정이 상했는지 내면을 탐색하고 어른스럽게 대처할 수 있는 방어기제를 구축하는 것이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한 지름길이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세상의 모든 타인은 나의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그 타인이 미성숙하면 미성숙한 대로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참 많기 때문이다.
표지그림 : 모드 섬너, <붉은 베니스>, 1952,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린 [모네에서 앤디워홀] 전시회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남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