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로 걸어 올라간 컨베이어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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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지


엔터 업계 인턴을 체험하고 나서 느꼈다.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어떤 역량을 제일 필요로 하겠어. 뮤직비디오, 비하인드 캠. 리얼리티 프로그램... 팬덤 장사에 제일 필요한 건 영상이잖아. 그럼 영상 만드는 걸 배워야겠지. 해외 진출도 많이들 하니까 중국어도 배워야지. 그래서 국비지원으로 영상 편집반에 들어갔다. 인턴 시절부터 배웠던 중국어는 HSK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좀 더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고 대학교 들어가서도 지난하게 글만 보다가 영상을 배우니까 처음엔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뭐든 발만 담그면 재미있지 않은가. 난 생각보다 기계치였고(당연하다. 어릴 때부터 한글과컴퓨터하고만 친하게 지냈다) 파이널컷 프로를 배우려니 윈도우랑 아예 키보드 구조부터 달라서 애를 먹었다. 단축키를 몇 번씩이나 써봐도 손에 익지도,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


특히 3D를 배울 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자꾸만 결과물이 비뚜름하게 나와서 천불이 났다. 컷 편집은 어느 정도의 꼼꼼함만 있다면 어찌어찌 할 수 있다 치자. 내 손에서 탄생한 초와 코카콜라와 사과는 숙연할 만큼 못생겼었다. 그땐 교육원에서 겉핥기식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내 실력이 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트폴리오를 잘 만들어서 여태 관련 업계에서 잘 벌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걸 보면서 인정했다. 그냥 내가 소질이 없는 거였다.


그래도 배운 기술을 살려 돈벌이를 하긴 했다. 사원 수가 달랑 3명인 영상 회사에 들어가 사수 없이 일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영상보다는 생중계 전문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영상을 전문적으로 만들 거였으면 컷 편집만 간신히 할 줄 아는 나를 고용했을 리 없다. 다행히도 입사한 이후로 한동안은 내 깜냥으로 할 수 있는 편집만 맡았다. 생중계가 있어 현장에 나갈 때면 장비 세팅 및 철수 등의 적당한 육체노동만 하고 연예인들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5분 길이의 모션 그래픽 영상 제작을 의뢰받은 대표는 나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해서 만들으라고 했다. 마스크 씌우기, 트래킹하기 정도만 기억하는 나한테 그 긴 걸 다 하라고? 그래도 일단 시키니까 했다. 방법을 몰라서 일러스트레이터 파일을 애프터 이펙트로 업어와 모션 효과를 넣으려고 했고, 파일이 무겁다 보니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새벽 3시까지 남아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만들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눈만 간신히 붙이고 회사에 정시출근했다. 파일을 받은 클라이언트는 당연히 별로라고 악평을 했고, 대표는 나더러 다시 만들라고 했다. 새벽까지 혼자 사무실에 남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만든 게 고작 그 정돈데 나더러 뭘 어쩌라고?


대표한테 면담 신청을 했다. 나는 영상 편집으로 들어왔고, 모션 그래픽은 못한다. 어차피 공고에도 모션 그래픽 업무에 대한 내용은 없었지 않나. 그래도 이름자막 넣는 것 정도는 간단하니까 했었다. 근데 이렇게 통으로 모션이 들어가는 건 내가 못한다. 싫은 소리를 하려니 손도 목소리도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얘기했다.


얘기를 다 들은 대표는 자기가 아는 사람한테 맡겨보겠다고 했다. 그래놓고 얘기가 잘 안 됐는지 다시 나에게로 떠밀려왔다. 나는 다시 한번 못한다고 했다. 대표는 갑자기 욱해선 “그럼 나가든가!” 소리쳤고, 그쯤 되니까 나도 더 이상 이곳에 있기 싫어서 “나갈게요.” 하고 바로 짐을 싸서 나왔다. 그 회사에 들어간 지 7개월즈음 되던 때였다. 고맙게도 그 회사에 있던 과장님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준 덕에 당분간 생계 걱정은 덜 수 있었지만, 서글펐다.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나는 그냥 내 몫을 다하면서 몇 해 동안 눌러 앉아 있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도 그 회사를 더 다녔다간 정신이 아팠을 것 같다. 가산디지털단지역은 삭막했다. 꾸역꾸역 빈 곳을 찾아서 지하철에 올라탄 사람들이 내뱉어져서 죽은 눈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에, 쉴 수 있는 공원 하나 없이 오피스 건물들과 공장들만 일렬로 주루룩 늘어선 광경에 숨이 막혔다. 그 무렵 사귀던 남자친구도 나랑 도통 맞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


터의 기운이 온 힘을 다해 나를 밀어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은 아예 영상 일을 하지 않는데 괜히 시간만 날렸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뭐든 배워놓으면 어떻게든 써먹는다고, 교육원에서 배운 프리미어로 팟캐스트 편집을 하고 있다. 끼워 맞추자면 생중계 현장에서 슬레이트 치던 가닥으로 녹음 전에도 슬레이트를 크게 잘 친다. 그럼 된 거라고 오늘도 대충 뭉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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