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다 머리부터 들이밀기

06

by 비지


방송작가를 관둔 시점이 3월 초였다. 4학년 막학기에 아침방송 막내작가로 들어갔으니 정진할 학업도 없었고, 당장 실무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공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2차함수 배워서 뭐해? 어차피 사회 나가면 돈 계산이나 할 텐데. 학생 때 품었던 생각이 사회 초년생까지도 이어졌다.


이때부터 취업을 준비했으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까 궁금하긴 하다. 그때도 알고 있는 것을 지금도 알았더라면 좋으련만, 그때의 나는 실무 경험을 쌓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안 하고 싶었지만 아이돌그룹 기획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엔터 업계의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이름 좀 들어봤다 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이력서부터 넣었고(소기업 아이돌에게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영세한 곳에도 많이 지원했었다) 꽤 큰 규모의 중견 소속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말이 인턴이지 알바에 가까웠다. 일단 근무기간을 한 달로 잡아 근로계약서를 쓰고, 그만두겠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한 달씩 연장이 되는 형태였다.


회사가 집에서 아주 멀었다. 그리고 그렇게 큰 사업장에서 일하는 것도 처음이었으니 기도 꽤 많이 빨렸다. 그래도 아홉 살배기 일기에 뮤직뱅크 시청 후기가 적혀 있을 정도로 K-POP이라는 장르를 좋아했기에 일은 쉽고 재미있었다. 팬 커뮤니티를 운영을 보조하는 일이었기에 가끔은 내 덕력이 도움될 때도 있었다. 가끔 아이돌들도 마주쳤다. 알바라서 그런지 제때 퇴근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류애가 뚝 떨어지는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오다가다 인사하는 매니저와 퇴근길에 만났고, 아이돌 컴백 쇼케이스 때문에 외근을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 업무를 도와줄 겸 같이 가지 않겠냐고 했다. 일손이 필요한가보다 싶어 그분과 택시를 타고 쇼케이스 현장에 갔다. 그런데 다음날 사수와 팀장이 나를 부르더니 내가 어제 한 행동이 잘못됐다고 했다. 처음엔 뭐가 잘못인지 스스로 생각해볼 시간을 준대서 어제의 나에게 책잡힐 만한 게 있었는지를 돌아보았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게 잘못인 걸까요?’ 답을 내놓아보기도 했다. 내가 말하는 족족 다 틀렸다고 하더니, 그 사람들이 내놓은 답은 예상 밖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 나서 쇼케이스 현장 일을 도왔다면 그건 직원을 사칭한 것이란다. 그럴 의도도 없었거니와, 타 부서 매니저가 일을 도와달라고 해서 간 건데.


어린 인턴이 뭘 얼마나 대단히 도움이 되었겠나. 그 매니저도 내가 일하는 동안 연예인 많이 보길 바라는 마음이에서 그냥 데리고 간 걸 수도 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명시된 근로계약서에 내 손으로 서명을 했으니, 굳이 끼워맞추자면 직원 사칭이라고 볼 수 있다고 억지로 생각했다. 인턴은 이렇게나 서글픈 위치구나, 생각하면서. 근데 구태여 덧붙이는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해버렸다. 회사 주변에서 유부남인 매니저와 같은 택시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인 게 잘못이란다. 회사라는 공동체가 얼마나 뒷말이 많이 오가는 곳인지 모르냐면서, 넌 구설수에 오르기 좋은 상이라 조심해야 한다고.


그 말을 하던 팀장은 알았을까? 날 위한답시고 한 말들이 내 잘못으로 지적한 것들의 진정성을 모조리 무너뜨린다는 걸. 납득하기 싫어서 끝까지 입 다물고 있었는데 내가 납득을 하지 않고서는 회의실에서 나갈 수 없는 분위기였다. 워낙 고집스러운 성격이라 알아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지만, 10년이 지난 이후에도 내가 들은 중 가장 어이없는 질책 중 하나다. 아니, 애초에 개인적인 감상이 그득 들어간 게 질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일을 계기로 그만둔 건 아니다. 그저 문제를 삼으려면 언제 어떻게든 삼을 수 있으며, 그 대상은 인턴이나 사원처럼 힘없는 말단직원이라는 당연하고도 슬픈 현실을 온몸으로 체감했을 뿐이다. 처음 방송작가를 했을 때 분에 넘치는 기회를 많이 얻어서 그런가, 매일 똑같은 허드렛일만 하는 감각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비빌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비벼서 경력을 채울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는데, 뭐 어쩌겠어. 내 발로 저벅저벅 걸어 나왔고 이렇게 커버렸는데. 낡고 지친 내 마음과는 달리 생각보다 안주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값진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야지.


작가의 이전글방송은 집에서 누워서 봐야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