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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아직까지도 이런 마인드를 갖고 살고 있다. 하지만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코로나 시기에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글쓰기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고 개인사업자를 냈던 해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빠르게 퍼졌다.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 줄줄이 취소되었고 사람들은 칩거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망하는 회사도 많았다. 행사를 뛰지 못하니까 내가 사랑하던 중소 아이돌들도 활동을 접거나 아예 해체 수순을 밟았고 소속사가 폐업되는 경우 또한 많았다.
여러 업계가 어수선해졌고 이제 막 걸음을 뗀 개인사업자인 나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없으니 일 자체가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잡아왔던 일도 취소되었다. ‘원하는 글을 써주는 걸로 돈을 벌 수 있네?’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시작했으니 속수무책으로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를 필요로 하는 의뢰인 모두에게 견적을 보냈지만 응답은 한두 건 올까 말까였고 잡아왔던 일마저도 너무 비싼 금액이면 연락이 오지 않을까 봐 헐값을 불렀으니 밥값 정도만 겨우 벌었다. 페이가 적은 일을 어떻게든 하나라고 얻으려고 작업해야 하는 분량보다 더 긴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아등바등하다가, 어떤 날은 일이 아예 없었다. 할 일이 사라지자마자 급격히 불안해졌다. 이제 견적 보낼 곳도 더 없는데. 그럼 나는 뭘 할 수가 있지. 나 뭘로 밥 벌어먹고 살지. 다른 직장을 구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다. 먹는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어도 밥맛이 없을 때가 많지 않았는데 밥이 안 넘어간다는 게 꽤 공포스러웠다. 잠은 이틀 연속으로 눈을 꾹 감고 있어도 선잠조차 자지 못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내과에 가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았다. 겨우 대여섯 시간 정도 자고 난 다음에는 고장 난 마음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에 가는 건 왠지 무서워서 심리상담센터에 갔다. 도대체 어떤 마음이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나 허우적대고 있을까.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마음은 역시나 인정욕구였다. 글쓰기에 어느 정도 재능과 흥미가 있었던 것도 맞겠지만, 인정욕구가 채워져야만 비로서 내가 쓰임이 있는 인간이라는 슬픈 생각을 그날부터 쭉 하고 있었다. 존재 자체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모르고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서 애를 아등바등 쓰고 있었던 거다.
그걸 알게 되니까 내가 너무 불쌍했다. 그리고 엄마가 미웠다. 감정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때문에 눈치 보는 성격으로 자란 것이 내 성격을 만든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걸 알아서였을까. 근데 말도 못하고 여태 꽁꽁 감춰두고 있다. 얘기를 꺼내면 울어버릴까 봐. 어차피 귀담아듣지도 않을 거니까. 언젠가는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고 엄마한테 털어놔야겠다고, 그게 인생의 가장 큰 숙제라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엄두가 안 나니까 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어차피 인정은 나에게 돈을 주고 부리는 사람들한테나 받으면 된다. 엄마는 나한테 일을 주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내가 밖에서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으니까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말을 들은 친구가 슬프다고 하는 걸 듣고 나서야 뒤늦게 좀 슬퍼지긴 했다. 그러게. 좀 슬픈 말이네. 누가 들어도 정신승리잖아.
아직 엄마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기 때문인 건지, 진짜 엄마가 나에게 무신경한 사람인지는 인생의 내공이 좀 더 쌓인 후에나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날 이후로 7년이 더 지났고 그 동안 꽤 단단해지긴 했어도 아직 엄마 앞에서 꺼내기엔 아프고 슬픈 말인 것 같다. 털어놓는다고 달라질까 싶은 마음이 불쑥 들면 괜한 얘기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평생 모른 채로 사시도록 두는 것도 슬픈 일이겠구나 싶기도 하다. 인격적인 성숙을 이루기까지는 아직 한참 먼 것 같다. 너무 막연한 말이긴 하지만, 내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을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오래 살아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