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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든 남이든 인간을 탐구하는 게 즐거웠다. MBTI도 인간을 탐구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이직하고 싶던 중에 MBTI 관련 교육과 상품을 파는 회사에서 콘텐츠 마케터를 찾는 공고를 보게 되었고, 나 아니면 누가 하겠나 싶어 지원했다. 사실 입퇴사가 잦다는 리스크 때문인지 서류에서부터 여러 차례 떨어지고 나니 기대감을 최대한 내려놓고 있다가 연락을 받았다.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직무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채용공고의 상단에 있는 키워드는 뉴스레터였다. 그 회사에서 만든 캐릭터의 페르소나에 이입해 독자들이 읽을거리를 쓰는 것이었다. 관심 영역에 대해 말하듯 쓰는 것이었고, 진심 다해 글을 쓰니 수신거부자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좋아하기도, 잘하기도 하니 일은 당연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뉴스레터는 애초에 부차적인 업무였다는 듯 새로운 일이 더께처럼 쌓였다. 이래서 부서명이 명확하지 못한 팀을 조심해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그 회사의 거의 모든 콘텐츠가 우리 팀을 거친다고 봐도 무방했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으니 실수도 늘어났고, 그럴 때마다 지적을 당했다.
잘못했으면 지적받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일이 너무너무 많은 걸 어쩌나. 글도 써야 해, 사내 교육도 사이사이 받아야 해, 월간보고서도 써야 해, 다른 직원들 스케줄 관리도 해야 해, 굿즈 아이템도 찾아야 해, 굿즈 관리도 해야 해, 캘린더도 만들어야 해, 발주 예약이나 수량 체크도 해야 해, 여러 곳에서 요청받은 일도 해야 해, 기타 자잘한 사내 이벤트도 챙겨야 해, 콘퍼런스 기획도 해야 해, 인턴 일도 가르쳐야 해, 근데 그 모든 걸 8시간 안으로 다 해야 해...... 바쁠 때는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고 팀장님이 말씀하셨지만, 그땐 그러기 싫었다. 8시간 내로 마칠 수 있도록 일을 주면 그만 아닌가? 이러니 내 직무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1년만 간신히 채우고 그만두지.
그래서 고연차를 뽑으면 좀 더 인내심과 책임감을 갖고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어림도 없지. 오래 일한 만큼 각이 빠르게 서고, ‘이러다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으면 바로 퇴사 각을 재기 마련이다. 내가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 회사의 대표님 때문이었다.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억지를 부린다 싶을 정도로 사소한 것에 집착하면서 화를 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오용되는 경우가 많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건 확실히 가스라이팅이었다. 사소한 것들을 내가 대답하지 못할 때까지 캐묻다가, 내 말문이 막히면 ‘네가 한 것은 기획이 아니다. 다시 해와라’ 하는 식이었다.
처음에 별로라고 했던 아이디어가 통과되기도 했고, 지난 회의 때 불같이 화냈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너그러워졌다. 근데 윗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넘길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길 아직까지도 다녔을 거다. 이곳은 내 연봉의 맨 앞자리를 바꿔줬고 잘한다는 칭찬도 꽤나 많이 들었으니까. 인정욕구를 채워주는 곳이라니. 오래 앉아 있어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에 땀이 차도 꽤 즐거웠다. 하지만 그 인정욕구가 발목을 잡았다. 일이 많아지니 실수가 잦아지고, 실수가 잦아지니 팀장님과 면담하는 횟수도 늘어나고, 면담 횟수가 늘어나니 의욕도 자신감도 떨어졌다. MBTI 회사이니 이곳에서 배운 대로 설명을 하자면 내 MBTI의 가운데 두 자리는 의미를 중시하는 NF인데 자꾸 의미 없는 일을 해야 했다. 이거 해봤자 어차피 생트집이나 잡힐 텐데. 이건 업무하고 전혀 상관이 없을 텐데. 대표님한테 내가 기획한 것들을 들고 갈 때면 숨이 막히고 손이 떨렸다. 중간관리자의 컨펌을 받았고 이 이상 내가 뭔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가까스로 채워놓은 인정욕구가 갉아먹힐까 봐 겁을 먹은 거다.
더 망가지기 전에 그만둬야겠다 생각했고, 글쓰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하기로 했다. 팀장님이 뉴스레터 리뉴얼까지 다 해놓고 어딜 가냐며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면서 내 직무를 덜어줄 수 있는 직원을 한 명 더 채용하겠다고 했지만, 글쎄. 몇 개월 간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었으며 설령 팀장님의 마음이 그렇다고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는 대표님이 있는 한 반려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래서 그냥 관뒀다.
이직처를 찾아볼 무렵 타로점을 보러 갔었다. 이직하고 싶은데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곳에선 연말즈음에 사탄 같은 상사를 만난다고 했고, 나는 그냥 친구들끼리 재밌자고 간 것이었으니 타로점의 내용을 싹 잊고 지냈다. 그리고 새로 이직한 곳에서 나는 타로점과 딱 맞아 떨어지는 운명을 맞닥뜨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