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성 정신병으로 퇴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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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지



서러운 마음에 회사 비상계단에서 훌쩍거리기를 반복하다가, 생각했다. 여길 뜨자. 콘텐츠마케터를 하나 더 뽑아준다고? 그럼 그때부터 지옥문 열린다.


대신 아무데나 들어갈 순 없었으니 매주 사람인을 뒤졌다. 마침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사보 회사가 있어 지원했다. 인상에서,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서 ENFP스러움이 묻어나오는 팀장님은 무조건 제때 퇴근하며 비딩이 없으니 야근도 없다고 해맑게 말씀하셨다. 회사 시설이 좀 낙후되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칼퇴하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출근하겠다고 했다.


팀장님이 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더러 알아서 판단하라고 해놓고 알아서 판단해서 일을 처리하면 왜 그렇게 했냐고 다그쳤다. 그리곤 "아, 이럴 거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한 건가?"와 같은 말투로 나의 의도를 넘겨짚었다. 그럴 거면 알아서 하라고 맡기질 말든가. 아주 메일의 톤앤매너까지 하나하나 다 잡아주든가.


나는 분명히 면접 때 얘기했다. 외부로 송출되는 뉴스룸만 진행했었고, 그땐 담당자가 한 명이었다고.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모른다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요청하는 자료나 언급하고자 하는 이슈가 무엇이냐에 따라 연락을 취해야 하는 대상이 다른데 그걸 왜 모르냐는 거다.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알려줄 수 없겠냐고 하니까 원고마다 달라서 알려주기 애매하단다. 아니 그럼 원고 작업할 때마다 알려줬어야지!


원고도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작업하라더니 알아서 작업하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며 디자인 작업까지 완성된 걸 뜯어고치라고 했다. 싸온 점심 도시락은 아예 못 먹었고 3시가 한참 넘어서야 시리얼바를 겨우 먹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에 팀장님이 시키는 대로 메일을 보내놓고 전날 못 먹었던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또 메일을 이렇게 보내면 어떡하냐며 밥 먹고 있는데 와서 뭐라고 했다. 밥 먹고 있는데 그러니까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워져서 그 자리에서 바로 눈물이 터졌다. 호된 방송작가 시절에도 회사에선 울지 말자고 다짐했고 근 10년 동안 회사에서 운 적이 없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터진 거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지.


아차 싶었던 팀장님은 사과하셨고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린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는 팀장님도 넋이 나간 표정이라, 나는 나대로 지친 상태이긴 했지만서도 팀장님이 심적으로 한계에 다다랐구나 싶었다. 이렇게나 넓은 이해심으로 참아주고 있는데 팀장님이 점점 선을 넘었다. 원고를 써가면 '그냥 별로다' '구리다'는 식의 아주 애매한 피드백과 함께 다시 써오라고 했고,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고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자리에 앉아 찌푸린 얼굴로 원고를 수정하면서 팀원들을 눈치 보게 만들었다.


팀장님도 힘들었을 걸 안다. 내가 입사하고 나서 상황이 갑자기 나빠졌고(꼭 내가 입사하는 타이밍에 그러더라?) 담당자가 팀장님하고만 소통하려고 하니 아주 성가셨겠지. 그래도 내가 욕받이무녀 전형으로 입사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심지어 갑작스럽게 비딩을 준비하게 되어(비딩 없다며 젠장!) 밤늦은 시간까지 남아있던 날. 언제 마칠 것 같다고 언질조차 주지 않고 또 혼자 인상을 팍 쓰고 있던 그날. 새벽 1시까지 의미 없이 남아 있던 나에게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난 모두가 수고했다는 의미를 담아 "어우 늦게 끝나네요." 하면서 미소 지었다. 근데 다음날 정시퇴근하는 나를 붙잡고 왜 퇴근하냐고 화를 내더니 "그때 새벽에 먼저 갈 때 뭐라 그랬어? '늦게 끝나네요?' 나는 몇 시에 퇴근했는지 알아?" 그러는 거다. 팀장님 퇴근 시간을 제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퇴근하는 게 꼴사나워 보였으면 일을 분담해주든가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에 앉혀놓고 혼자서 다 하려고 하셨잖아요.


점점 비인격적으로 변해가는 팀장님의 태도에 급성으로 신경쇠약이 왔고, 매일 회사 가기 싫어서 침대에 누울 때마다 울었다. 잠이 안 와서 수면명상을 틀고 자는데, 자기 확언 명상이라는 걸 틀어놓고선 우느라 잠을 새벽까지 못 자기도 했다. '나는 잘 될 수 있다. 나는 소중하다. 나는 행복하다.' 이런 내용이었는데 내가 조금도 그렇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랬다. 감은 눈을 비집고 눈물이 막 흘렀다. 그러고는 진짜 이러다 내가 죽겠다 싶어서 퇴사하겠다고 했고, 본인도 좀 미안하긴 했는지(과연?) 그때 내가 담당하고 있던 원고만 마무리하고 차주에 퇴사하라고 하셨다.


죽겠다 싶어 도망쳐 나온 거지만 그땐 그 회사가 나를 뻥 걷어찬 기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구박을 들은 것이지만, 내심 '진짜 내가 일을 못하나?' '여태 쌓은 경력이 정말 물경력인 건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동안 괴로웠다. 마침 관두고 나온 때가 화창한 봄이었고,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아침마다 런닝을 하면서 다시 취준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동안 나를 받아주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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