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도 장기근속하고 싶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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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지


프리랜서로 굶어죽을 순 없다. 다시 회사로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글쓰기 경력을 살려서 갈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를 구한대서 지원했다. 광고가 들어가는 회사치고 야근이 없는 곳이 없다는 사전 정보 하나 없이 그냥 면접을 보러 갔다. 가서 야근하냐고 물어보고 많이 안 한대서 바로 입사했다. 주제 정해주고 쓰라고 하면 쓰는 거지. 엄청 단순하게 접근했던 거다.

운이 좋았던 건지 다니는 2년 동안 야근했던 적은 없다. 일도, 재미없는 소재의 글을 맡을 때마다 지루했지만 그래도 시간 내로 끝내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 버틸 만했다. 광고대행사의 주적, 비딩에 대한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팀장님이 팀원들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비딩에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달라고 하긴 했지만 PPT 장표는 거의 팀장님이 다 만들었고 발표도 다 도맡았다. 소재나 업로드 시스템이 까다로운 브랜드도 다 본인이 한다고 했다. 어차피 돈 벌려고 적당한 데 골라 들어간 곳이니 인정욕구를 채우지 않아도 됐고 그냥 내 깜냥만큼 무난하게 일하면서 시간 채우고 퇴근하면 그만이었으니 최적의 직장이었다. 주에 3회는 출근하고 나머지 이틀은 재택을 할 수 있는 사내복지 시스템도 있었으니 더욱 다니기 좋았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장기근속을 할 수 없는 운명인 건지 여러 이슈가 터졌다. 30분 거리의 회사가 1시간 10분 떨어진 머나먼 곳으로 옮긴다는 거다. 왕복 2시간 반에 달하는 거기를 다닐 만큼 이 회사가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시간 효율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너무나도 큰 리스크였다. 게다가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새로운 사옥으로 출근하라고 해서 정이 한 차례 떨어졌다. 12월즈음에 난방도 안 되는 곳에서 언 손 호호 불어가며 일하다가 페인트 냄새에 머리까지 아파버리니 카페로 피신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몇 주간의 소란 끝에 공사가 모두 끝나면 쾌적한 시설이 꽤 만족스럽기도 했다. 긴 출퇴근 시간 동안 책 읽으면서 독서량도 높일 수 있었으니 거리가 먼 것에도 제법 적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우리 팀에서 한 명을 정리해고 할 테니 나갈 사람을 정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처리를 해주겠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팀원들끼리 눈치게임을 하란 소리였다. 적응할 만큼 했으니 이직하기 귀찮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오랫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매너리즘을 느꼈다면 실업급여 챙겨준다고 할 때 퇴사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들 100% 솔직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밥줄이 걸린 문제인데 얼마나 예민했겠냐고. 결국 나갈 사람을 고르지 못했다.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무슨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낙오자 하나를 고르는 것도 아니고, 일을 이렇게 처리한다고?

결국 인사팀과 면대면으로 얘기를 할 때 알았다. 이 사람들이 말장난을 치고 있었다는 걸. 퇴사한다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의적인 선택이며, 그러니 실업급여를 주는 건 위법이라고. 팀원들 입장에선 “아니 그럼 당연히 아무도 안 나가죠.” 말곤 할 말이 없는 거다. 실업급여를 챙겨준다고 했으니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한 팀원이 있었을 텐데. 짧은 시간이지만 감정 소모가 엄청났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입 싹 닫고 모른 척한다고?

말을 잘못 전달한 팀장님의 책임인지, 말을 바꿔놓고 팀장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인사팀의 책임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땐 회의실에서 팀원들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섣불리 한 점 죄송하다며 팀장님이 사과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생각해보면 후자 같다. 여러 가지 이유로 팀원들을 힘들게 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느끼기엔 일을 열의 있게 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가 야근하는 일이 없었으니 내 기준에선 좋은 상사였기 때문일까.

그 일로 회사에 신뢰가 떨어져서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고, 결국 2년을 꽉 채운 후 또 이직을 하게 된다. 내 흥미 영역의 콘텐츠를 다루는 곳이었기 때문에 재밌게, 오래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변 친구들도 어떻게 그렇게 잘 맞는 곳에 들어갔냐고 했다. 하지만... 다음 장에서 후술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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