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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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지


사실 난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공부야 시험기간에나 바짝 벼락치기 하면 되는 거였고, 납득이 안 되면 하지 않는 성격은 그때부터 유구했기 때문에 공부를 안 했다. 이 재미도 없고 도움도 안 되는 걸 왜 해야 하지? 재밌는 것만 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없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강아지가 주인공인 팬픽을 시작으로 온갖 K-POP 아이돌을 좋아하며 팬픽이라는 명칭이 포타로 바뀌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쓰고 있다. 이 글 쓰면서 생각난 건데 초등학교 때 동네 고깃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낳은 새끼 5마리가 주인공인 팬픽도 스프링노트에 미피 젤펜으로 썼었다. 새삼 정말 꾸준했다 싶다.

요즘도 생각한다. 팬픽 쓰기만큼 재밌는 게 없으니 어느 졸부가 나타나서 나를 고용해줬음 좋겠다고. 네가 무슨 글을 써도 좋으니 주에 5개씩 글 써서 올려놓으라고 막 지시하는 거지. 아, 진짜 천직일 텐데.


고3 때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 됐으니까 밤늦은 시간까지 방에서 불 끄고 팬픽 쓰다가 밖에서 기척이 들리면 바로 Ctrl+s 누르고 엄지발가락으로 전원 끄고 자는 척했다. 잠은 인서울을 목표로 한 수험생마냥 하루에 두 시간씩 잤다. 팬픽 써야 하니까.


그러다 수능 100일즈음 됐을 때 이러다 학교 근처 대학에 갈 것 같았고, 그건 이상하게 싫었다. 그 무렵에는 보통 다음카페에서 글을 썼고, 팬픽이 올라가는 게시판 외에 작가들이 사담을 남기는 게시판이 따로 있었다. 거기에다 썼다. ‘제가 사실 고3이라... 100일 뒤에 대학교 합격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팬픽의 주인공이 탈퇴하는 바람에 더는 연재하지 못하는 글이 되었지만...)


말하는 거 좋아하고 글 쓰는 거 좋아하니까. 취업률 같은 거 고려도 안 하고 모든 원서를 국문과로 써서 냈다. 그러고 나서도 관성처럼 덕질을 했고, 당연하게 팬픽을 썼다. 졸업작품으로 내야 하는 현대소설도 당시 덕질하던 아이돌의 팬픽 단편을 이름만 바꿔서 냈고,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운 글이라는 평을 듣고 당당하게 졸업했다.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이 꾸려가는 이야기라니, 이 장르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취향대로 글을 써서 올리고, 몇 개월 뒤에 다시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당연하지. 내 취향대로 썼으니까. 내 입맛대로 담근 김치가 잘 익은 묵은지가 됐을 때와 비슷한 쾌감인 거지.


연예인 좋아하고 글 쓰는 거 좋아하니까, 뭐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고 냅다 방송작가 일에 뛰어들었다. 관두고 이 일 저 일 전전하면서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한참 뒤에 생각이 났다. 나는 글 쓰는 걸 제일 자신 있어 하고 좋아했지, 참. 방송작가 일을 계속했더라면 애저녁에 글쓰기가 업이 됐을 텐데 또 많은 길을 돌고 돌았다.


그래도 최근 진행했던 팟캐스트에서 게스트로 모셨던 이랑 님이 그러셨었다. 하고 싶은 말이 계속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라고. 애초에 팟캐스트도 말이 많아서 시작하게 된 거고, 쓰는 소설마다 분량이 차고 넘쳐서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다. 할 말이 있어야 쓸 것도 있다는 건 당연한 거고, 나는 항상 말이 많다. 이랑 님 얘기를 듣고 나니까, 비로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문호도 어쨌든 쓸 게 있어야 되든 말든 할 거 아닌가. 쓸 거리가 안 떨어지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야.


팟캐스트 녹음 전에도 “나 오늘 진짜 할 말 많아.” 언젠 안 그랬던 것처럼 들뜬 얼굴로 그런다. 글감은 다 떨어졌나 싶을 쯤 “아, 나 이런 거 보고 싶다.” 갑자기 눈에 총기가 돈다. 이게 내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라 믿고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야겠다. 뭐가 됐든 뭔가를 생산해내는 것에 제일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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