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외쿡살이

홍콩가이

감자튀김과 와인의 어느 가을

by 후룩쥔장

1.

어느덧 10월이다. 이곳 영국에서 처음 맞이하는 가을.

런던의 가을은 그 명성에 걸맞게 써머타임이 해제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저녁 5시면 어둠으로 온 사위가 어두워진다. 이런 식이면 그렇게 들어왔던 오후 3시부터 깜깜해지는 겨울도 금새 올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우울해진다. 그때가 되면 그 긴긴 밤을 뭘하며 보내야 할까?


계절의 변화 때문인지 학교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알바시간을 오전으로 바꾼 관계로 1교시가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일터로 달려가야 하는 나로서는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없었지만,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수업이 끝난 후 교실뿐 아니라 컴퓨터실이나 칸틴(canteen:매점)에도 학생들이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다들 어디로 숨어버리는 걸까? 어둠은 일찍 몰려들고, 알싸한 바람은 불어오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바야흐로 어느 만만한 이의 방에 짱박혀 술 마시기 딱 좋은 때가 아니던가.

그리하여 알바가 없는 주말이면 으레히 우리는 만만한 중국걸, 실린의 집에 모여 맛난 음식과 그에 빠지지 않는 와인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날도 내 노트북에 잔뜩 깔린 바이러스를 치료하겠노라는 가열찬 의지를 빌미삼아 우리는 주말 아침부터 ‘Elephant & Castle’에 살고 있는 실린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다른 모든 학업이나 과제를 빌미삼아 모이는 시간들이 그러하듯, 대학시절 유난히 팀별 과제가 많았던 나의 기억을 반추해보건데 여자들은 모였다 하면 일단 먹는 일에 열중한다. 그날 우리 역시 애써 들고 간 무거운 노트북은 한쪽 구석으로 쳐박아둔 채 실린의 슬리퍼를 하나씩 꿰어차고 가까운 할인점으로 달려가 바구니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그날의 요리는 ‘크림 스파게티’와 ‘갈릭바게트’, 그리고 이와 곁들일 ‘와우소스의 샐러드’.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영국에 와서 공통적으로 발전한 것은 바로 일취월장하는 요리실력이겠다. 그 중에서도 요리는 주로 내가 담당했는데 그것이 귀찮음으로 여겨지기보단 혼자 해먹는 음식에 질려있던 우리로서는 함께 먹는다는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다. 또 내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이들을 보면 다음엔 또 어떤 요리를 해줄까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기도 했다.

'아, 긴긴 런던의 가을밤 외로운 여인네들이여. 음식과 술이 없었다면 이 외로움을 어찌 극복했을 것인가?'



2.
그날도 마트를 휘젓고 다니며 열심히 쇼핑에 열중하고 있는데, 항상 천방지축인 우리의 중국걸 실린은 평소와 다름없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며 거침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녀의 폰은 우리처럼 매번 충전해 써야 하는 ‘pay as you go’가 아닌 한달 정액제로 한국폰처럼 사용할수 있는 ‘line’이라 기본한도 내에서는 무제한 사용이 가능했다. 가뜩이나 그 입에서 수다가 멈추지 않는 실린에게 핸드폰은 떨어뜨릴 수 없는 필수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린이 누구와 불라불라 하더니 갑자기 "재키에게 물어보고"라 하는 것이 아닌가? 누군데 내 이름을 들먹이는 거지?
알고보니 통화상대는 같은 반 홍콩가이였다. 내용인즉슨 내가 자기 집에 왔으니 너도 놀러오라는 용건. 오늘 그녀는 우리집에서 머물 것이니 너도 알바 끝나고 와서 놀다가라는 얘기를 내 허락도 없이 하고 있는 거였다. 그치 않아도 지난번 몇번의 문자와 전화를 씹어준 이후로 홍콩가이는 나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간단한 인사 외에는 서로 대화가 없었다.


처음 그가 우리 반에 들어왔을 때 쌘 티쳐는 처음인 모두에게 그러하듯 어디서 왔느냐 물었다. 홍콩에서 왔다는 그의 대답에 우리는 모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홍콩이라면 당연히 영어를 구사하는 곳인데 굳이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오다니 이해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쌘 티쳐 역시 마찬가지로 이해할수 없어했고 그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홍콩사람이라고 다 영어를 잘하지 않아요. 나는 부모가 네팔 출신이라 홍콩에 살 뿐 영어 대신 네팔어를 해요"라는 얘기를 두서없이 했다. 이후로 정말 홍콩에서 왔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만큼 그는 영어를 못했고 같은 동양인으로 지난번 우리의 브라이튼 여행에도 동참했으며 가끔 내게 전화를 걸어 학교숙제를 봐달라 하기도 했다.

학교숙제를 봐주기 위해 처음 맥도날드에서 단 둘이 만난 날, 뭘 먹을건지 묻는 그에게 나는 배고프지 않으니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 했다. 빨리 숙제를 끝내고 혼자 쇼핑이나 한 후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전화로는 그의 얘기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리스닝에 약한 내게 기본적인 단어와 문법, 억양과 발음이 무시된 그의 영어를 알아듣는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나서 무슨 얘기인지 눈과 입을 보고 알아야겠기에 잠깐 만난 자리였다.

자꾸만 먹을 것을 권하는 그에게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것 같아 나는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감자튀김이라며. 사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도 맥도날드에서 버거 대신 감자튀김을 좋아했다. 비오는 날이면 맥도날드 감자튀김이 생각났고 우울한 날 감자튀김 한 봉지면 위로가 되기도 했다. 결국 그날 그와 나는 학교앞 맥도날드에서 감자튀김을 먹으며 정말 볼것도 없는 교과서의 문제를 풀었고 돌아서 나올땐 대체 이 문제가 만나서 풀 만큼 의미가 있는 건가 의아하기만 했더랬다.


어쨌든 실린은 그 홍콩가이를 그녀의 집에 초대하는 것에 우리의 의견을 물었고 손님인 주디와 나는 여긴 엄연히 너의 집이니 네가 결정할 일이라며 우리는 상관없다고 대답해주었다.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 새우가 듬뿍 들어간 크림 스파게티를 만든 후 허겁지겁 입으로 쑤셔넣고 입가에 허연 소스를 묻힌채 우리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소화가 될쯤 오븐에 구운 갈릭바게트를 먹고 그럼에도 또 무언가 허전한 듯하여 '크림스파게티에는 와이트 와인'을 빼놓을 수 없다며 와인을 사 오기로 한 그의 알바가 끝난다는 10시를 기다렸다.

실린의 더블침대에 셋이 나란히 엎드려 낄낄거리며 수다를 떨다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넘어 있었다.알바가 끝났다며 출발한다고 알려왔던 홍콩가이의 전화가 온지 2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아무리 멀어도 튜브를 타고 온다면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전화를 해봤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얘 왜 아직도 안와? 뭔일 난거 아닐까?"

평소에도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그의 행동들을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가 오는 도중 마음이 변해 그냥 집으로 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화 한번 하고 가면 누가 뭐래?"
집주인인 실린은 핸드폰으로 그에게 전화를 해대며 열받아 했다.
“집에 가는것도 좋다 이거야. 누가 못가게 하냐고? 문제는 왜 전화기를 꺼놓느냐는 거야. 사람을 걱정시키잖아. 난 정말 이런 거 너무 싫어."

"얘는 왜 전활 안 받아. 한번에 그냥 온 적이 없어. 항상 어디로 튈지 모른다니까”

"맞아. 지난번 브라이튼 갈때도 얘땜에 우리 다 버스 놓칠뻔 했잖아. 시간 개념이 없는거야 뭐야?"
우리는 사람을 기다리게 해 놓고 연락없는 그에 대해 한마디씩 했고 결국 그냥 집에 갔나보다 결론을 내리고는 다시 우리의 수다에 열중했다.

그렇게 그의 존재를 잊어가고 있을무렵, 함께 엎드려 있던 한국언니가 창밖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순간적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블라인드가 쳐져있는 창문밑 작은 틈새로 방안을 엿보고 있는 두개의 눈과 마주치곤 비명을 질렀다.

"엄마야."

그대로 침대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었다. 처음에는 무슨 고양이나 동물인줄 알았던 그것은 사람의 두 눈이었다.



3.

그였다.
튜브를 타고 역에 도착한 이후 지난번 한번 왔다 간 그의 기억만으론 그 집을 찾을 수 없었고, 마침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는 바람에 연락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그쯤에서 그냥 돌아갈만도 하련만 끈질기게 이골목 저골목을 헤매며 족히 1시간 넘는 시간을 그는 그 험한 동네에서 방황했다는 것이다.

그가 오기 몇분 전, 나는 실린방의 형광등이 너무 눈부셔 스탠드를 찾아 켜두었었다. 그는 그 스탠드 불빛을 보고야 지난번 왔던 집임을 기억해냈다고 했다. 마침 그녀의 집 창이 길가로 나 있는 1층이었기에 창문으로 우리의 모습을 확인할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창문을 열고 셋이 쪼르륵 창가에 매달려 그에게 들어왔다 가라며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는 멀리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친구랑 같이 왔는데 넘 늦어서 가봐야겠다 블라블라 말한다. 우리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와 밥이나 먹고 가라고 권하고 그는 됐다면서도 내게 창가로 뭔가를 건냈다. 엉겁결에 받아든 흰 종이봉투 안에 따끈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종이봉투를 열어 보니 기름에 튀긴 감자튀김이었다.
예전 몇번 밖에서 그를 만났을 때 내가 항상 먹던 감자튀김이었다. 그는 그걸 기억하고 이 늦은 밤, 감자튀김을 사 소중히 안고온 것이다. 무슨 ‘달밤의 세레나데’도 아닌 것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그는 창 너머에서,우리는 창 안쪽에서 달밤에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가야겠다며 그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다른 봉지를 또 꺼내 내게 건넨다.

"For you"

수줍게 건넨 비닐봉지 안에는 와인이 두 병 들어있다.

내가 제일 기다리고 있는게 이거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 나뿐 아니라 우리모두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특별히 내게 주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이 왠지 그 밤에 소박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뭐지? 왜 가슴이 따뜻해지는 거지? '
난 두명의 여인네 뒤에서 엉거주춤 서서는 멋적게 웃으며 와인과 감자튀김 봉지를 받았다.
사실 별거 아닌데 그 동안 촌스럽고 매너 없게만 여겨졌던 그가 그 밤에는 왠지 다르게 보였다.
'나 지금 감동받은 거니? 작은 일에도 감동받는 나, 나 정말 외로운가봐.'


결국 그 밤. 그는 들어왔다 가라는 우리의 끈질긴 설득에 친구와 함께 들어와 음식을 먹고 얘기를 나눴다. 그가 사 온 와인을 다 비우고도 모자라 결국은 근처 24시간 오프 라이센스 샵에 가서 로제와인 두 병을 더 사온 채 우리는 온 밤을 하얗게 밝히고 끊임없는 얘기를 나눴다.



PS.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 가을이 되니 영국 런던에서의 어느 가을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묻는다면 조금은 쓸쓸했던, 하지만 본연의 내 자신에게 가장 충실했던 영국에서의 날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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