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여전히 제주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독서를 멀리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레 글쓰는 시간도 줄어들더니 어느새 일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요. 작년 유월에 제주 경마장에서 첫 문을 열었던 애월감성은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짧은 가을을 지나 눈 오는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으며 그렇게 어느새 일년이 되었습니다.
올해 오월의 제주는 유독 눈부시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 어느 때보다 비가 많았던 겨울과 봄을 지내왔기 때문인 듯 합니다. 참으로 길고 지루했던 비소식, 그로 인해 몸도 맘도 무거웠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주살이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주날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월의 태양_이곳이 천국일까?
딱 지금인 오월부터 10월, 길면 11월까지 제주살이는 더없이 행복합니다.
아침부터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에 풀과 나무는 더없이 푸르고 까만 돌담은 더없이 깨끗하며 잔잔한 바다는 더없이 파랗습니다. 산과 바다, 들판과 숲길 어디에서나 어떤 모습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예술 그 자체로 사진이 찍히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여유롭고 행복해보이고 내 돈 주고 사먹는 음식들도 맛있기 그지없습니다.
'이곳이 천국이구나!' 진부하지만 그런 생각이 절로 들며 다니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지요.
여행 온 이들은 이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이들이 부럽기만 하고, 과감한 행동파들은 곧바로 제주살이를 위한 수순을 밟기 위해 집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사는게 뭐라고 복작복작한 도시생활을 고집하는가? 이런 곳에서 살며 사람답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과감한 행동 뒤에 어른거리는 불안감은 이런 생각으로 그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찬란하기만 한 이런 날씨에 제주살이는 그 어떤 미사여구도 소용없고 그 어떤 불안 따위도 범접할 수 없는 황홀 그 자체가 됩니다.
바람_제주의 바람은 상상초월
제주는 바람이 많은 곳이죠. 다들 알고는 있는데 살아보면 이 바람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주 오래 전, 친한 친구가 제주시내에 놀러왔다 이곳 처자들의 머리를 보고 놀랐노라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무지막지하게 바람 부는 날이었는데 이건 뭐 머리가 사정없이 헝클어지는 통에 곱게 빗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며 우스갯소리를 했었는데요.
제가 살아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가녀린 분들은 그야말로 넘어질 정도로 불어제끼는 날이 많습니다. 그것도 한 방향으로 부는 것이 아니라서 이 방향, 저 방향 마구잡이식으로 사정없이 불어댑니다. 바람에 날아간 마당의 건조대며 화분이며, 세숫대야를 찾아 주변을 헤매는 건 이제 일도 아니랍니다. 예전 옥상 있는 집에 살땐 깜빡하고 걷지 않은 빨래를 찾아 옆집들을 돌아다니기도 했다지요.
모두의 로망이었던 바닷가 까페들은 이 바람이 더욱 지긋지긋합니다. 폴딩도어는 열어볼 수도 없고 두꺼운 시스템 창마저 여는 순간 떨어져 나갈듯하며 파도치는 소리는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중산간이라고 다를게 없는게 그 많은 나무들이 쉴새없이 흔들리는 소리와 끝날 것 같지 않은 휑휑거리는 바람소리에 절로 공포가 느껴집니다.
습기_바닷속을 걸어다니는 것 같애!
육지에서 제주로 이사할때 챙겨야할 첫번째 가전제품이 '제습기' 입니다.
장마철에나 느껴봤던 육지생활의 습기는 그러나 제주살이를 시작하면서 그 강도에 저절로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해마다 4월이면 이어지는 비, 일명 '고사리 장마철'을 시작으로 6월의 장마, 그리고 수시로 내리는 비에 집안 내부는 바로 습기의 공격을 받습니다. 제품마다 조금은 다르지만 제습기의 습도는 기본 80%를 찍으며 심한 곳은 98%까지 찍히기도 합니다. 집안에 가득 들어찬 습기는 옷장의 옷과 이불, 그릇을 덮치다 몸까지 늘어지다가가 종국에는 머리까지 무거워져 종일 바닷속 좀비처럼 걸어다닙니다.
제주살이를 시작했던 첫해, 가장 크게 깨달았던 건 제주에선 가죽은 절대 기피 품목이란 것이었습니다. 육지에서 값 비싸게 주고 구입했던 가죽재킷, 무스탕, 명품 가방 결국 다 갖다 버렸구요. 가죽으로 만든 구두, 부츠까지 몇해 보관하다 결국은 과감히 내다버렸습니다. 비싼 목재 가구나 그릇등에도 곰팡이가 수시로 올라와 결국은 플라스틱으로 교체했습니다.
눈_이글루 만들어 봤어?
대한민국의 남쪽 끝자락의 아름다운 섬, 당연히 한겨울 제주는 따뜻할 줄 알았습니다.
동남아까진 아니더라도 왠만해선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기온의 날씨니 한겨울에도 눈보긴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전 살면서 제주에서 가장 많은 눈을 봤습니다. 굳이 등산장비를 갖추고 한겨울 한라산을 오르지 않아도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마당을 걸어다닌건 모두 제주살이에서였습니다.
제주 중산간은 한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정말 무섭게 내립니다. 바람까지 더해져 집안에서 거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면 마치 송풍기를 틀어낸 영화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이죠. 그런 날은 밤새 내린 눈으로 꼼짝도 할수 없는 고립상태가 됩니다. 쌀과 라면, 물의 비상식량이 없다면 몹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차량은 커녕 짐승도 오지 않는 그야말로 새하얀 설원위 산장에 갇힌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땐 눈이 오면 김칫통과 스티로폼 박스를 들고 나가 이글루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완성된 이글루 위로도 끊임없이 눈이 쌓여 그 형태가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눈은 밤새 내려 쌓였습니다. 다음날 아이는 당연히 학교도 못갔고 온 가족은 집밖으로 한발작도 못 나간채 2박 3일동안 비상식량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태풍_자연은 정말 무서운 거구나!
해마다 여름이면 제주엔 크고 작은 태풍이 몇 개씩 지나갑니다.
서울에 살땐 미처 몰랐던 태풍의 위력을 이곳 제주에선 혼이 나갈 정도로 경험하게 됩니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현지인들은 날아갈 물건들을 점검하고 집안에 틀어박힙니다. 그야말로 차도 사람도 안 보이는 태풍전 고요가 지나고 태풍이 시작되는 소리가 시작되면 공포가 시작됩니다. 비와 바람이 밤새 사정없이 불어닥치고 창문이 덜컹거리며 지붕이 벗겨지고 온갖 것들이 날라댕깁니다. 집안에 있어도 들리는 바람소리에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이어지는 공포는 제주를 떠나고 싶은 마음마저 듭니다.
실제로 코로나 때 아이와 함께 한달살이, 일년살이로 오셨던 많은 엄마들이 태풍 전까지 아이와 행복한 여름을 보내며 제주살이에 만족하다 태풍을 맞으며 지역 커뮤니티에 실시간 올렸던 댓글들은 이러했습니다.
'제주가 이런 곳인 줄 몰랐다.' '당장 비행기 타고 육지로 돌아가고 싶다.', '그동안 보고싶지 않았던 남편이 너무 보고싶다.', '년세를 연장하려 했는데 더는 못 살겠다.'. '너무 무서워서 아이랑 밤새 껴안고 떨었다.', '제주는 살 곳이 아닌 것 같다.' 등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태풍이 지나간 자리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평화가 찾아왔지만요.
결론_ 제주의 날씨도 따뜻하게 안을 수 있다면 비로소 완전한 제주살이
참으로 변덕스런 제주 날씨는 여행에서 가장 큰 변수인 것 같습니다.
온전한 여행도 이리 어려운데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린 자영업과 제주살이는 또 오죽할까요?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매출은 예측할 수도 없어 없습니다. 어제 예보가 아침에 달라지며 예보가 아닌, 실시간 중계가 되기도 하는 곳이 바로 제주니까요. 제주 날씨 예보에는 해와 구름, 비가 함께 그려지며 강수확률 50%가 찍히는 날이 참 많기도 합니다. 뭐 어쩌라는 건지? ㅎ
이런 날씨임에도 제주살이가 행복한 저와 남편은 아직 제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되더라구요. 비오는 날이면 비오는 대로 일을 중단하고, 해가 나는 날이면 더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여행을 즐기고, 일몰이 아름다운 날이면 놓치지 않고 해안가에서 일몰을 감상하며, 바람부는 날이면 조용히 집에 틀어박히고 눈이 오는 날이면 비상식량을 가득 챙겨 집안에서 바깥 풍경을 액자삼아 감상하며 그렇게 한달을, 일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십년이 넘게 제주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제주는 여전히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