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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코리 Sep 14. 2019

결혼하지 말고 아빠랑 살자

명절, 딸바보에게 굉장히 불편했던 시간

결혼 전에 나는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싫어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아이들을 보고 귀엽다고 하는 사람들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간혹 차분히 카페에서 혼자 커피의 향과 책을 즐길 때면 주변 아이들의 돌고래 소리에 나의 이완된 신경은 곤두섰다. 음식점에서 뛰어다니며 의자를 넘어뜨리는 아이들을 보며 저것들이 원숭이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를 생각했다. 차라리 아이를 낳지 않고 아내와 둘이 '무자식 상팔자'의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자주 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4년이 지난 어느 날 고민하던 끝에 딸아이를 낳았다.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엄청 늙은 학부모가 되어 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2년이 지나 또 한 명의 여성이 동거에 합류하면서 나는 진지하게 아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 인생의 첫 번째 남성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 학교에서는 왜 이런 것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원망하고 싶었지만, 항상 그렇듯 교과과정의 문제로 치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빠로서 필요한 역량을 사교육으로 채워갔다. 역시 한국에서는 사교육 만한 것이 없었다. 



베스트셀러에 있는 심리학 책부터 전공 서적까지 읽어 내려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부터 에리히 프롬까지 읽으면서 무엇인가 알게 된다는 기쁨보다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와.. 아빠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어느 책에 나왔던 사례를 하나만 살펴보자. 약혼자가 있는 여성은 결혼을 앞두고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날 밤 슬퍼 보이는 모습으로 조용히 술을 들이켜는 남자를 만났고 그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여성은 약혼자와 파혼을 하고 그 남자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 모두가 말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후 시간이 흘러 상담 세션에서 그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가 아빠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독하게 술을 마시던 아버지가 주지 않았던 사랑을 그 남자로부터 받고 싶은 무의식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논의하지 않기로 하자.) 


아니!? 이런 부분까지 내 탓이 되는 거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혹시 나중에 딸들이 자라서 그 책을 보게 될까 봐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 버렸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나니 아이가 하는 이야기의 뒤편에 있는 생각이나 욕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왜 그런 생각이 하게 되었는지 묻기 시작했다. 아이가 무엇을 보고 듣는 것이 아이의 인생 각본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알고 싶었고, 되도록 좋은 영향만 받았으면 하는 아빠의 작은 소망도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았던 장면들이 하나둘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명절은 딸바보에게 굉장히 불편한 시간이었다. 



좁은 부엌은 여성들로 꽉 차 있다. 남자들은 TV 앞에 앉아 있거나 방에서 자고 있다. 이 장면이 딸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고이 키운 딸이 저렇게 부엌에 들어가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놈이 방에서 자고 있는 것 자체가 화가 치미는 일이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렇게 여성들이 준비한 음식이 큰 상 두 개에 펼쳐지고 남녀가 따로 먹기 시작한다. 남자들이 모여있는 상은 왠지 장소가 좋은 곳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상이 다 차려지면 다른 상에 음식을 차리고 늦게 먹었다. 여성이 숫자가 많을 때도 남성이 있는 상으로 오지 않고 비좁게 쪼그리고 먹거나 교대로 식사를 했다. 내 딸이 남의 집에 가서 쪼그려 앉아 밥을 먹는다는 상상을 하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식사는 남녀 구분 없이 먹는 것으로 합시다.


아버님에게 이 장면이 손녀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당신의 손녀가 다른 집에서 노역을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바로 이 장면의 영향이라는 등등 다양한 협박을 서슴없이 했다. 손녀딸들을 애지중지 하며 항상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시는 아버지가 이것을 마다할 리 없었다. 도리어 왜 그 생각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을까 한탄하셨다. 그러게. 나도 평생 명절 때마다 이렇게 밥을 먹어 왔는데 왜 이제야 이것이 이상해 보였을까. 


사유 패러다임은 본능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행위를 속박하고 제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패러다임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사람들이 패러다임의 기초에 대해 이성적인 검토를 충분히 진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유효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 팡차오후이, 칭와대 인문학 교수


누구에게 유효했던 것일까?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아니면 TV 앞에 앉거나 방에서 자는 사람들에게?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치우는 것을 돕는데 딸아이가 이제 자신도 돕겠다며 상을 행주로 닦고 있었다. 친척분들 중에 한 분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셨다.


우리 예O가 시집 잘 가겠네. 


아니 이게 무슨 망언입니까. 집안일을 돕는 것과 결혼을 잘하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집안일하러 결혼을 하는 겁니까.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유교 경전을 읽고 자란 나로서는 그런 말을 면전에 던질 수가 없었다. 그냥 심기가 불편해졌다. 명절 때 그냥 집에 있어야 하나. 


인간은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세상을 능숙하게 구조화할 수 있어서, 제어하기 어려운 자원에서 복잡하면서도 일관성 있는 행동을 복제해 낼 수 있다. 
- 앤디 클라크


철학자 앤디 클라크는 인간이 세상을 구조화하여 추론을 하지 않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구조적으로 보면 굉장히 치밀하다.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여성상을 보여주고 '~하면 시집 잘 가겠네' 등의 다양한 언어로 넛지(선택을 유도하는 방법)를 끊임없이 준 다음에 마지막은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 '이제 슬슬 결혼해야지' 등으로 마무리를 한다. 무서운 것은 이것을 복제하여 내리려는 사람도 별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이 환상적인 2단 콤보를 시연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그 남자랑 살아갈 것도 아니고 결혼자금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최근 회사에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되었다. 다음은 '미혼여성 괴롭힘 방지법'이 시급하게 도입되어야 함을 딸바보로서 강력하고 주장하고 싶다. 망언할 때마다 결혼자금 500만원 벌금.



장모님은 육 남매 중에서도 아내를 특별히 애지중지 하셨다. 게다가 혼자 타지에 떨어져 있는 아내가 신경이 쓰이시는지 싱싱한 야채와 과일들을 자주 보내신다. 그리고 나를 볼 때마다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한다.


자네 어떻게 먹고 있는가. 우리 미O가 요리가 시원찮아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제 입맛에 딱 맞아서 정말 잘 먹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지만 기본적으로 부모님 세대가 가지고 계신 생각이 느껴진다. 아내는 남편에게 음식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전제. 어머님 세대는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집안일을 당연한 듯이 계속해 오셨다. 우리 세대는 그런 어머님들의 희생으로 결혼 전에는 집안일을 안 하다가 결혼 후에 엄청난 집안일에 직면하게 된다. 만약 남자가 집안일을 하지 않는 상황이면 여성은 어머님이 해주시던 일에 남편의 일까지 더해지고 아이가 태어나면 자녀의 수만큼 부담은 가중된다. 이런 상황이면 결혼만큼 남자에게 유리한 것이 없으니, 위에서 언급한 환상의 2단 콤보도 남자들이 시연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것이니 당연히 해야 한다는 느낌으로.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집에서도 자기 분량을 하고 혹시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자기 분량만 하는 아이들이 되면 좋겠다. 아니.. 바깥일도 집안일도 다 잘하는 커리어 맨과 결혼하면 좋겠다.  


외도 상대를 소개해주는 프랑스 회사는 어느 날 1만여 명의 고객들에게 '왜 남편을 배신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다소 당혹스러웠다. 많은 여성들이 '남편이 집안일을 너무 안 해서'라고 대답했다.
- 하노 벡, 경제학자 




여기까지가 딸바보가 명절을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였지만, 아들을 가진 부모님들은 또 다르게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관점은 서로 다를 수 있으니 가장 평화로운 방법은 결혼 문화가 앞으로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기 기증이 높은 나라는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장기기증자가 되고, 기증 비율이 낮은 나라에서는 특별한 액션을 취해야만 장기기증자가 되는 것이다.
- 최인철, 심리학자 


자동적으로 해야 한다고 느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선택하는 것. 지금의 결혼 문화는 장기기증이 많은 나라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이제는 반대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두고, 정말 결혼하고 싶은 사람만 특별한 액션을 취하여 선택하는 문화가 되면 좋겠다. 물론 그래도 어떤 이상한 놈을 데려와서 그 고생을 하겠다고 하면 딸바보로서 아이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겠지만. 일단 당분간은 계속 이야기해 볼 생각이다. 


예O야 아빠랑 살자. 결혼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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