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코리 Dec 30. 2019

한달살기와 SMART한 정신병

숫자와 비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간단한 방법

아무도 모르는 외국의 어느 거리에서 나는 이방인처럼 걸었다. 외국인이 드문 이 도시의 사람들은 한 번씩 나를 돌아보았고 그 시선이 싫지만은 않았다. 모던한 스타일의 카페에 들어서자 진한 커피 향이 느껴졌고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에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노트북을 열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니 글감이 쏟아졌고, 나는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학교가 끝날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현지 친구들과 영어로 농담을 하며 교문을 나섰고, 나는 그 경험조차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아이에게 충분한 시간을 가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 아이들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확인하니, 오전에 카페에서 발행했던 브런치 글이 다음 메인에 올랐는지 흐뭇한 알람이 계속 오고 있었다. 내일 글감은 한달살기와 행복을 연결해 볼까.

 


이러한 관념적인 한달살기 판타지는 구체적인 예약이 진행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현지에서 아내와 함께할 여유로운 커피와 아이들과의 즐거운 시간은 점점 더 멀어졌고, 엄청난 검색량과 지나치게 많은 선택지 그리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비용이 한달살기의 현실이었다.


아내와 단 둘이 하거나 혼자 했던 배낭여행과는 달리 아이들의 정서와 현지 생활을 고려한 여행 조건은 까다로웠다. 새벽 이동과 경유 비행기를 제외하면 항공권 가격은 급상승했고, 숙소 위치와 조건도 제한적이었다. 그렇게 저렴했던 에어비엔비 숙소는 4인 조건을 입력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합리적인 가격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꿈같은 추억과 행복을 남겨줄 것 같았던 다양한 맛집, 액티비티들도 모든 비용에 *4가 되면서 진심으로 웃을 수 없는 부담스러운 리스트가 되었다. 50달러는 200달러가 되었고, 200달러는 금방 800달러가 되었다. 한달살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강사님, 1월 신년 워크숍 특강 부탁드리려고 전화드렸어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무거워진 마음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강의 의뢰와 계약이 쏟아졌다. 여행 기간에 잃을 수입까지 기회비용으로 더해지니 숫자는 더욱 크게 보였고, 한달살기를 하려다가 가치 판단의 프레임마저 잃을 지경이었다.


숫자가 그렇게 중요했으면 휴직은 왜 했어. 죽을 때까지 소처럼 일하지.


이미 치료가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한 나의 정신병은 잠깐 회사를 쉰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일상의 모든 것은 구체적(Specific)이고, 측정 가능(Measurable)하며, 연관(relevant)되고 실현 가능(attainable)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항상 누군가 쫓아온다는 마음으로 데드라인(Time-bound)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SMART함을 일과 생활에 녹여 절차탁마하고 자아실현하는 것이 인간 욕구의 마지막 단계라고 착각하는 정신병.


어렵게 치료 단계에 도달했던 SMART한 정신병은 한달살기를 준비하면서 다시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그래서 한 달 시원하게 쉬는 거지?


여행을 가도 간 것이 아닐 것 같다고 걱정하는 아내의 물음에 걱정 말라는 대답을 시원하게 하면서도 나는 혹시나 올지 모를 사업 문의와 강의 의뢰의 창구를 열어뒀다. 정신병 때문에 일에 대한 끈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지만, 아이들과 함께할 먹거리와 현지 일정에 시원하게 투자하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우여곡절 끝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어느 날, 나는 아이들과 반팔티를 입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이들과 여권을 보며 입국 신청서도 함께 작성해보고 컵라면을 먹으며 현지에서 무엇을 할지 이야기했다.


아빠, 꿈만 같아요.
뭐가?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이요.
와.. 아빠가 고맙네.
아빠가 왜요?
그냥.. ㅋㅋㅋ


그 순간 무방비 상태였던 SMART한 정신병은 눈 녹듯이 녹았고, 숫자와 비교의 프레임은 그 경계를 넘어섰다. 한달살기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정신병을 억제할 수 있는 작은 넛지를 하나 더 발견했다.



사회는 우리에게 셀 수 있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주택의 가격은 셀 수 있지만 가정의 행복은 셀 수 없다. - 로렌스 볼트


아이들과 함께 탄 항공권 가격은 셀 수 있지만, 비행시간 동안 나눈 대화의 여운은 셀 수가 없었다. 한달살기 숙소 가격은 셀 수 있지만,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 표정은 셀 수가 없었다. 만약 대화의 여운과 아이의 표정이 숫자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 순간 그것은 대체 가능하며 교환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많은 것이 중요하다며 수치화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셀 수가 없었다.


아하.. 그래서 미루거나 돈으로 보상하려 하는구나.


물론 한달살기를 한다고 해서 나의 고질적인 정신병이 완치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한 달 후 즈음이면 무엇을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지 어렴풋이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달살기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혼하지 말고 아빠랑 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