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코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코리 Aug 15. 2022

한국에서는 상대가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어느 여인의 이야기

추락사 사건을 조사 중이던 해준은 죽은 남자의 중국인 아내 서래를 만나게 된다. 팜파탈을 적으로 만난 영화 <간기남>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서래의 분위기와 해준의 시선. 영화는 중심 스토리 외에도 둘의 관계를 스마트폰, 립밤, 수면, 녹음, 호흡, 구두, 날짜, 초밥 등 다양한 미장센을 끊임없이 꺼내면서 결코 짧지 않은 러닝 타임을 계속해서 몰아친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가 봐.   


출처: 네이버영화


해준은 남편을 잃은 서래를 감시하며 점점 더 그녀와 가까워지고, 그녀의 알리바이가 증명되면서 내심 안도한다. 마음을 터놓고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잠시. 해준은 서래가 범임인을 짐작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게 되는데...

               



#품위


서래는 자신을 담당하는 형사가 품위가 있어서 좋다고 한다. 해준은 자신의 품위가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형사로서 품위를 잃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해준으로서 이미 드러난 서래의 범죄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출처: 네이버영화


완전 범죄를 위해 이용당했다며 괴로워하는 해준을 서래는 달래 보지만, 해준은 이미 <헤어질 결심>을 한 상태였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해준은 서래를 체포하지도, 곁에 남지도 않는 결정을 내린다.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치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붕괴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떠나는 그를 뒤로하고 급히 찾아보는 서래.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의미를 보여주는 무미건조한 듯한 검색창과 뒤늦게 남자의 말뜻을 이해하고 무너져 내려버린 그녀의 표정. 그렇게 해준과 서래의 1막은 끝이 난다.

 

출처: 네이버영화


#사랑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 처음만 어렵다.      


해준의 말처럼 공교롭게도 둘은 서래의 두 번째 남편 호신의 피살 사건으로 다시 만난다. 산보다는 바다가 좋다는 둘의 대화가 복선이 된 것처럼 2막의 배경은 바다가 가까운 도시로 이동한다. 서래는 피 냄새를 싫어하는 해준을 위해 사건 현장의 피를 씻어내고 남편을 깨끗하게 닦은 후 경찰을 맞이한다. 과거 범죄를 덮어줬던 자신 때문에 서래가 다시 한번 관할 지역으로 남편을 데려와 죽였다고 생각한 해준은 서래를 보자마자 다그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출처: 네이버영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는 그녀. 범인이 그녀라고 확신하는 남자. 하지만 다시 한번 피의자와 형사로 만난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처럼 가까워진다. 1시간에 47번 잠이 깨는 불면증에 시달리던 해준은 1막에서 처럼 그녀의 호흡에 맞춰 피의자 이송 중에 숙면을 한다. 서래는 해준이 피의자로 대해주는 게 좋다며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요.     


영화 대사를 되뇌던 서래는 해준 앞에서 완벽하게 이 문장을 구사한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하는 서래.


출처: 네이버영화


그 사람이 들었어요.
어떤 이야기를요?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제가 언제 사랑한다고 그랬어요?

 

두 번째 남편 호신은 '사랑해'라는 말을 가볍게 내뱉지만, 서래가 피는 담배조차 참아내지 못한다. 서래는 조용히 담뱃재를 털어주고 다시 물려주던 해준이 그립다.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던 남녀. <헤어질 결심>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지켜주며 사랑이 행동임을 보여주는 사랑 영화였다.


출처: 네이버영화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의 키를 1막에서는 해준이 가지고 있었다면 2막은 서래가 가지고 있다. 붕괴된 해준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서래. 그가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했던 증거를 다시 돌려주며 자부심을 찾으라 한다.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점차 드러나는 2막의 진실. 해준의 음성을 인터넷에 공개하겠다는 호신의 협박에 서래는 영화 속 그 어느 장면보다 흔들리며 괴로워한다.


출처: 네이버영화


왜 그런 남자랑 결혼했습니까.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호신과의 결혼이 두 번째 <헤어질 결심>이었을까? 둘의 마음은 물리적인 공간을 초월하면서도 다시 만남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헤어질 결심에도 불구하고 해준이 보고 싶었던 서래. 100억 원대 사기로 쫓기는 호신을 데리고 해준이 있는 곳으로 이사한다. 잠깐 다시 만났지만 호신의 죽음으로 예고된 이별. 결국 해준의 자부심을 지켜주고 싶었던 서래는 '증거를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하라'는 1막의 해준의 말처럼 가장 강력한 증거인 자신을 제거하는 것으로 세 번째 <헤어질 결심>을 보여준다.


출처: 네이버영화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둘의 사랑을 정의하는 서래의 말과 비슷하게 <헤어질 결심>의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 영화도 끝을 맺는다.




출처: 네이버영화


사실 이 영화의 결론은 이미 액자식 구성을 통해 영화 초반에 모두 드러난다. 해준의 집 안에 붙어 있는 미결 사건의 용의자 산호. 해준은 가인이 유부녀라는 이유로 산호와 가인의 사이를 무심코 넘겨버린다. 사건 자료를 읽어 보던 서래는 ‘죽을 만큼 좋아한 여자네’라며 본능적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잡아버린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서래가 던지는 질문에 이어 쫓기는 산오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몸을 던져버린다. 산오가 몸을 던지기 전 가인이 외치는 소리는 해준이 마지막 장면에서 서래를 찾는 소리와 꼭 닮아있다.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벽에 내 사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사랑은 참.. 논리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잘 만들어진 사랑 영화는 더 복잡하고 여운이 깊다. 매사에 논리 따지기를 좋아하는 나에서 영화 <헤어질 결심>은 미결 사건이 되지 않을까.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매거진의 이전글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