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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사회복지사 Oct 18. 2019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들

출산율 0명인 시대. 세계 최초로 0명대 진입이라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두 아들을 키워보니 왜 출산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실감 난다. 부모가 짊어지는 책임이 그 어느 때 보다 막중하고 무겁기에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지 않을까. 아이 없이 부부의 행복을 위해 살겠노라고 선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무엇 때문에 출산은 물론 결혼조차 미루거나 포기하는가. 출산과 동시에 주 양육자가 필요하다. 핵가족화되면서 주 양육자가 온전히 부부의 몫이 됐다. 경제적인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둘 중 한 사람은 양육을 위해 다니고 있는 직장을 쉬거나 그만둬야 한다. 솔직히 떠밀려서 그만두는 현실이다. 그 몫은 경제적인 지위나 수입 차이와 상관없이 대부분 여성이 책임을 지고 있다. 또 여성이 과도하게 짊어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시스템도 한몫 거든다. 이 모든 고민이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아닐지. 그뿐인가 희생의 대가는 가혹하다. 출산 후 쉽게 돌아오지 않는 몸과 산후 우울감은 이어지고 새벽에 깨는 아이 때문에 잠 못 드는 밤이 계속 이어진다. 정신적으로 압박감이 계속 이어진다.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오롯이 한 여성이, 부부가 짊어져야 할 몫이기에.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과연 출산율 0인 시대에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것이 얼마나 공감될진 모르겠으나. 감히 말씀드리자면, 아이를 키우면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의 세상까지 경험할 수 있다. 오롯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들여다보게 된다. 과거 부모의 잘못이나 지난 상처가 이해된다. 어쩌면 부모님이 아이를 가장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왜곡되고 서툴었던 지난 사랑을 깨닫는다. 온전한 사랑을 하게 된다.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나의 욕구를 잠시 미루거나 포기하면서 책임의 또 다른 사랑을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아이와 함께 큰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았다. 지극히 개인 경험을 용기 내어 나누고 싶었다.  


자녀는 계획하에 낳기

계획한다고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녀 계획도 그렇다. 모든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찾아오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미리 준비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은 차이가 난다. 마음부터 다르다.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에 기뻐할 수 있겠지만 갑작스러움에 당혹함을 감추지 못할 때 있다. (첫째 때 그랬다)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임신의 기쁨이 반감된다. 어쨌든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몸과 마음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첫째 임신 전으로 돌아간다면 건강한 몸을 위해 영양제를 미리 챙겨 먹을 것이고 운동을 하거나 몸에 해로운 것 끊었을 테다. 적어도 자녀의 수는 상대 배우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인 셈이다.   


임신, 출산뿐만 아니라 육아 역시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한다고 한들 완벽한 부모는 불가능하지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 나름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 의외로 아이를 키우다 보면 부부 관계가 미묘한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이유는 양육 태도가 달라서다. 하지만 아이가 불안하거나 혼란스럽지 않기 위해서는 일관된 양육 태도를 보여야 한다. 바람직한 양육 태도를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충분한 신혼기간 갖기    

만약 아이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신혼 기간을 충분히 가질 것 같다. 계획 없는 임신, 출산으로 첫째가 생겼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맞이했다. 오롯이 아내와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아쉽다. 여행도 다니고 취미 생활도 같이 해보고 좀 더 여유 있는 자기 계발 시간도 가져보고 신혼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다. 언제 아이들을 키우고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아이가 크면서 아내와 나도 같이 나이 듦에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세 살까진 무조건적인 사랑하기

세 살까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그때까지는 큰 힘 들이지 않아도 가능하다. 존재 자체로 성스럽고 아름다우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아닌가. 분만실에서 아이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 감동뿐이었다. 건강하게 태어나준 것 만으로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다른 조건이 필요 없었다. 존재 자체로 사랑이 셈 솟으니 세 살 때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가능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좀 더 안아주고 같이 시간 보내고 따뜻한 눈빛 한 번이라도 더 보내준다면, 칭찬과 사랑 표현에 인색하지 않으면 부모 역할은 이로서 충분하다.   


네 살부터 인간다운 인간 만들기

아이와의 힘겨루기가 시작되는 시기다. 자아가 크고 있다는 증거다. 스스로 하기를 원하고 뭐든지 자기가 주도해야 직성이 풀린다. 부모와 첫 실랑이가 시작되는 시기다. 세 살 까지는 사랑만으로 충분했다면 네 살부터는 적당한 교육, 훈육이 필요하다. 가지고 싶은 게 많아지고 원하는 것도 많아진다. 자기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쉽게 짜증내고 화내거나 소리지르기도 한다. 사랑만으로 이해하기 힘든 시기다. 전략이 필요하다. 부모가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심한 생떼 부리거나 고집스럽고 공격적인 행동도 보인다.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네 살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기 같다.  


아이를 통해 과거의 나와 마주하기

두 아들을 보면 나의 어린 시절과 오버랩될 때가 있다. 두 아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마주한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 같다. 가끔 두 아들을 보면서 미해결 된 상처남은 내면 아이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마치 두 아들이 나인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아들들을 안고 있으면 치유되듯 마음이 편해진다. 오히려 네 살, 7개월 된 두 아들에게 위로받는다. 가끔 퇴근하고 두 아들을 꼭 안는다. 긴 말 필요 없다. 짧은 침묵 속에 충분한 위로는 되기에. 내면 아이는 스킨십을 통해 치유됨을 두 아들 덕에 배웠다.      


과거의 부모의 실수를 이해하기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부모님을 이해하게 됐다. "왜 그랬을까"에서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로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완벽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사회복지사로, 인간 이해에 대한 공부를 하고, 부모 교육을 누구보다 많이 들었지만 결국 내 문제 앞에서는 초라해졌다. 때론 나에게 부모님(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는 나와 부모님의 연결고리다. 부모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나와 두 아들에게 위로가 된다.  


사랑의 또 다른 얼굴, 책임 느끼기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욕구는 우선순위에 밀린. 가끔은 혼 전처럼 친구들과 벽 늦게까지 놀고 싶은 마음이 문뜩 든다. 언제 친구들과 놀았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때론 혼자 여행 가고 싶을 때도 있다. 하고 싶어도 아내와 아이들 생각하면서 절제한다. 나의 유일한 낙은 소파에 누워  TV 보는 게 전부 일 정도다. 자식들은 통통한 살코기를 주고 정작 본인은 앙상한 뼈만 있는 생선 대가리를 먹는 것처럼 부모의 마음은 숭고하다. 왜 부모라고 맛있는 살코기를 먹고 싶지 않겠는가. 자식 먼저 챙기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같다.


아이는 부모님이 가장 바라는 것

어쩌면 아이를 가장 바라는 것은 나보다 부모님이지 않을까. 누구보다도 임신 소식을 기뻐하시던 부모님. 명절 때면 아이들로 웃음꽃이 핀다. 대화가 없고 어색하기만 했던 집안 분위기가 결혼과 아이로 확 달라졌다. 서로를 향한 냉랭한 긴장감이 사르르 녹았다. 부모님의 대화 주제가 온통 손자뿐이다. "커서 ~뭐가 돼라!" 아버지는 네 살 아들의 꿈을 이미 정하셨다. 아들의 이름을 손수 지으시려던 아버지. 여전히 무뚝뚝한 아버지지만 예전에 없던 웃음이 얼굴 가득하다. 부모님의 마지막 과제를 푼 것처럼 뭔지 모르게 편안해 보인다. 그만큼 나의 결혼과 아이를 기다리셨다.


육아는 아이와 함께 성장하기

누구나 부모는 처음이라 아이를 키우면서  시행착오를 게 된다. 아무리 신통방통한 육아 관련 책으로 작심하여도 공부하더라도 실전과 이론은 전혀 다르다. 분명한 것은 내 아이는 적용이 안 될 때가 더 많다. 실수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아이와 함께 자란다. 그사이 나만의 육아법을 터득하면 득도한 거나 마찬가지다. 


이는 부모를 보고 자란다. 부모의 말과 행동을 모방한다. 부모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아이를 보면 그 부모가 보이듯 부쩍 첫째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부모는 아이들의 거울이기에 더 조심스럽다.

아이들에게 남겨야 할 가장 큰 유산은 아이와의 관계보다 아내와의 관계가 우선임을 깨닫는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결국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안정적인 관계였다. 나의 부모를 보더욱 확신이 든다. 최고의 육아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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